사진앨범

경주 교촌마을 월정교 다리

샘물문화 2018. 5. 9. 17:01

이번 경주행은 순수하게 장보고의 흔적을 찾아보기 위해서이다. 

경주에 밤에 도착하여 첨성대 부근에서 숙소를 잡고 야간스케치를 나왔다.

삼각대 없이 밤에 촬영하였다. 조리개(F=5.6)는 조이지 않았고 

땅바닥이나 고정된 곳에 걸쳐 놓고 타이머를 이용(AV)하여 촬영하였다.

월정교(月淨橋; 月精橋)는 760년대 경문왕 19년에 세워졌다고 하지만 

이곳에 다리를 설치한 것은 그만한 필요가 있었을 것이고

또한 상당기간 유지되었을 것이다. 그 옆에 경주 최부자집의 건물자리가 있었고

옛부터 건물터라는 생각이 들었다. 황리단길 역시 마찬가지고...

과거부터 경주를 대표하는 화려한 금입택(金入宅)의 존재를 알아보고자 들렸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금입택..... 

무려 39채나 기록되어 있다. 

금으로 만든 집이라는 금입택

그야말로 화려함의 극치요... 최전성시기를 말해주는...

장보고 사후 20여년이 지난 870년 경의 기록이다. 870년이 경주 역사상 신라 역사상 가장 번성한

경주의 인구가 당시에 100만명에 달했다고 추정할 수 있는 거대한 도시였다.

그래서 경주를 골든시티(Golden City)라고 하지만 그 기반에는 장보고가 있다는 것이다.

장보고의 최전성시기의 도움으로 화려하고 부강하고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를 이루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는 장보고의 덕을 부인하고 있으나 증거는 장보고의 청해진제국의 위력 덕분이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금입택을 만들었던 것은 진짜 금(Gold)이 아니라 전남 완도에서만 나오는 황칠이었다는 것이다.

전남 완도산에서만 나오는 베타 세리넨 성분이었음을 2006년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발표하였다.

장보고의 청해진제국에서 흘러들어온 돈과 물자로 이루어진 세계최강의 부국 경주가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지나간 역사를 보고 짜깁기하여 말기니 쇠퇴기니 운운하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 소리이다.

장보고로 인하여 최전성기가 만들어진 것이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870년경의 경주는 100만명이 사는 세계 최부강의 도시였다.





그러나 경주는 초라했다. 

경주가 신라왕들의 무덤으로 전락하고

장보고에 대한 기록은 겨우 무덤가 안내판에만 나오고 있었다.

장보고가 거쳐간 흥덕왕-희강왕-민애왕-신무왕-문성왕의 무덤가의 안내판에만 나오는 장보고......

그 무덤가를 촬영했다. 

찾아오는 사람도 극히 드문... 

또한 알아보는 사람만 알아볼 수 있는....

그나마도 신라중심사관에 의한.... 한번 찾아보자!!!


먼저 간 곳이 희강왕이다. 

흥덕왕이 죽고 난 이후에 김명에 의해 만들어진 왕이다.


희강왕 표지판에는 자살했다고 나온다. 민애왕(김명)에 의해 저질러진 희강왕의 자살이다.

희강왕을 자살로 내몬 김명 민애왕은 김우징에 의해 처참한 최후를 맞는다.

바로 5천명 대 10만명이라는 20배의 병력의 차이를 극복하고 장보고 5천기마병에 의해

대구 수성들녘에서 참패를 당한다. 그리고 경주 월유댁으로 도망하다 장보고에 잡혀 처형되었다.

10만명으로 충분히 이길 수 있다는 계산을 한 23살의 민애왕- 그러나 그는 민심을 얻지 못했다.

군사쿠테타로 집권한 민애왕이 갈 곳은 없었다. 

대구 동화사 비로암 앞에 서 있는 삼층석탑- 민애왕탑이다. 민애왕의 일을 업(業)으로 업보로 보고 있다.

경주 민애왕의 묘- 표지판에는 장보고가 군사를 이끌고 와 마침내 병사들에게 피살되었다고 하고 있다.

한반도 최대의 전쟁- 장보고와 민애왕의 전쟁!~ 5천 대 10만명의 전쟁에서 진 민애왕이다.

요즘말로 하면 쿠테타로 집권한 민애왕과 장보고의 힘을 얻은 김우징(신무왕)과의 전쟁이었다.

신라 왕권의 적통을 바로 세워준 사람이 바로 장보고였다.

그래서 장보고의 군사력에 힘입어 등극한 사람이 신무왕이다.

그 표지판에는 장보고의 힘을 빌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적통전쟁에서 승리한 것이다. 장보고의 덕으로


그러나 아쉽게도 신무왕은 등극한지 6개월만에 병으로 사망하고 만다. 아쉬운 대목이다.

신무왕이 더 살았더라면 오늘날의 신라는 이런 모습이 아니었을 것이다. 

신라왕들의 무덤으로 경주는 전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인간해방의 원조로 자리잡아 한반도는 노비제도가 없는 부강한 나라를 만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신라귀족층들의 반대로 인하여 좌절된 것이다.

장보고의 꿈과 이상이 신무왕의 죽음으로 날아간 것이다. 이어 등극한 문성왕은

장보고의 덕으로 왕위에 올랐지만.... 

그는 아니 장보고의 덕으로 적통을 되찾은 신라왕족들은 장보고를 배신한 것이다.

장보고는 결코 반란을 한 적이 없다.

신라 골품제 유지... 기득권 유지가 그들의 목표였기에 장보고는 제거된 것이다.


2014년 1월 표지판이 세워진 날까지의 경주의 역사인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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