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살아가며

남원 실상사 벅수

샘물문화 2017. 9. 4. 15:02

남원 실상사를 찾은 이유는 

1200년전 장보고가 차씨앗을 숨겨 들어와 몰래 재배하기 위해 실상사를 세우고

차밭을 관리하면서 차를 재배하여 한중일 삼각무역의 상품으로 사용하였다고 하는 것을 확인하고자 함이다.

절에서 만난 비구니 스님에게 조용히 

"혹시 실상사에 차밭이 있습니까?" 하고 물으니 스님은 무슨 소리냐고 하면서

여기는 전혀 차 같은 것을 없다고 딱 잘라 말하는 것이었다. 

그래도 혹시 숨기는 것 아니냐는 의혹에서 마치 무엇을 아는 것처럼

"실상사는 창건초기부터 차가 아주 유명하다고 하던데.... "

하고 운을 떼니 스님은 

"그래요? 처음 듣는 이야긴데요" 

하면서 더이상 말 붙이기 어렵게 만들어버린다. 

주변 근방에서도 차 재배하는 곳은 없다고 하면서...


그래서 확인하지 못했다. 

지리산의 차는 하동에서 유명하지만..... 실상사에 없다니.... 실망을 하고

한국차의 원산지는 암튼 지리산이다. 

장보고가 몰래 들여와 당나라에 들키지 않으려고 깊은 지리산 계곡 실상사에 심은..... 

당시 차나무는 당나라가 특별관리하는 금수품목이었고 

밀매하다가 걸리면 목숨까지 내놓아야 하는 중요한 당나라 전매품이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남원 실상사에서 보는 조선시대의 벅수(돌장승)는 마음을 흐뭇하게 만들어준다. 차를 입구에 세워두고 걸어 들어가 벅수를 감상했다.


上元周將軍- 幸亥年五月(1731년) 제작



大將軍- 雍正三年乙巳三月立東邊(1725년) 제작



擁護金沙逐鬼將軍


차밭 대신에 연꽃밭이 실상사 앞에 펼쳐져 있다. 산속에 아닌 평지에 실상사가 위치한 까닭이다.






장보고는 완도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완도뿐만이 아니라 남원에도, 부안에도 저기 머나먼 신라의 경주에도 장보고의 자취가 남아있다. 지금으로부터 1200년전 천년고도라는 경주는 장보고에 의해 처음으로 평정되고 신문왕을 등극시킨 킹메이커로 부상했다. 그리고 장보고가 백제섬놈이라는 이유로 암살당한 후 40년만에 신라는 후백제 견훤에 의해 또 다시 유린당하고 결국 망하였다. 이유는 "함께 꿈을 꾸는 공동체"가 되지 못하고 신라골품제에 의한 분열과 편가름의 문화를 만들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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