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섬을 가다

새로운 희망, 오동도

샘물문화 2022. 10. 24. 14:03

오동도에서 새로운 희망을

 

오동도에는 오동나무가 없다. 그런데 이름은 오동나무를 지목하는 오동도(梧桐島)이다. 오랫동안 사람들의 손을 탄 섬이기에 반드시 그 곡절이 있을 것이다. 오동나무가 없는 섬을 왜 오동도라 했을까? 한번쯤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

오동나무는 옛부터 왕()을 상징하는 봉황이 앉아 쉬는 나무로 알려져 있고 봉황은 아무리 쉴 곳이 없어도 오동나무가 아니면 앉질 않는다고 하여 동양에서는 귀하게 여긴 나무이다. 봉황이 날아드는 오동나무가 있는 섬, 오동도는 그야말로 중요한 섬이었다는 말이었고 그 역사가 깊다는 소리이다.

여수 주변에는 유독 봉()을 사용한 지명이 많다. 쌍봉, 비봉, 금봉, 구봉, 전봉, 봉계, 봉산, 봉황산 등등의 지명은 오동도가 있어 풍수지리적으로 안정적인 형국을 취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또한 봉황이 먹는다는 대나무 열매가 있는 죽()의 이름도 많다.

여수(麗水)는 본래 백제의 원촌현(猿村縣)이었는데, 신라에서 해읍현(海邑縣)으로 고쳤고, 바로 견훤의 후백제 건국의 시발점이 되었다. 의자왕이 신라에 당한 원한을 갚고 장보고제국의 영화를 재현한다는 명분으로 견훤을 중심으로 봉기의 시발점이 된 것도 이곳이다.

엄청나게 호응했다. 그 힘은 후백제를 건설할 추진력을 제공했다. 여수를 중심으로 한 세력의 도움이 없었다면 견훤의 후백제는 불가능했고 무진주(광주)에서의 대대적인 환영과 더불어 전라도 일원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합세하여 신라에 대항하고자 일어선 견훤에게 힘을 보탰던 것이다. 이러한 여세를 몰아 견훤은 신라 경주까지 쳐들어가 장보고의 뒤를 이어 신라의 개혁과 변화를 강력하게 요청했다. 천년 신라 역사상 장보고와 견훤이라는 걸출한 인물에게 골품제라는 신분제로 인간을 억압하고 노비로 전락시켜 소외시키고 수탈한 책임을 추궁당했다. 그러나 신라는 변하지 않았다. 장보고는 물론 견훤과의 약속도 저버리고 배신하며 고려 왕건에 투항한 것이다.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고 940년 견훤의 근거지였던 해읍현인 이곳을 여수(麗水)현이라는 지역민을 위무하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물이 좋아서 인심이 좋고 여인들이 아름다운 고장이란 뜻으로 여수라는 이름을 내려준 것이다. 그러나 이름처럼 귀하게 여긴 것이 아니라 천민부락집단인 부곡(部曲)으로 격하시켜 버렸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율촌(栗村), 별량(別良), 진례(進禮), 소라(召羅) 10여개가 있었다고 한다. 지금도 그 지명이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한 여수에 한 줄기 빛이 내렸다. 고려 공민왕 때 신돈이 출현한 것이다. 신돈은 경상도 창녕의 화왕산에 있는 옥천사라는 절의 노비에게서 태어났다. 매골승으로 천한 일을 하다가 공민왕에게 발탁되어 고려 사회를 개혁하고자 누구도 하지 못한 노예해방과 토지개혁을 부르짖은 이 나라 최초의 노비출신 혁명가였다. 비록 6년간이었지만 그의 힘은 엄청났다. 당시 고려 전체를 뒤흔들, 세계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개혁을 추진했던 것이다. 바로 전민(田民)을 통해서이다. 전민이란 부당하게 빼앗긴 땅을 되돌려주며, 억울하게 노예가 된 사람을 국가가 공식적으로 나서서 신원을 회복하여 주는 노예해방운동이었다.

한반도 역사에서 인간의 보편적 가치를 구현하기 위해 노비해방을 부르짖은 것은 828장보고의 노예해방, 그리고 1300년 몽골의 고르기스에 의한 고려의 노예제 개혁요구, 그리고 1371신돈의 전민추정도감에 의한 노비해방 추진, 1801년 이충무공전서를 편찬한 윤행임에 의한 노예해방주장 등이다. 1894전봉준의 갑오농민봉기로 자국민이 자국민을 종신적으로 물건 취급하여 사고팔며, 악질적이고 야만적인, 세계사에서도 그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신분제도는 사라졌지만 아직도 우리의 문화 속에는 그러한 비인간적이고 야만적인 제도의 소산들이 사라지지 않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처절하게 우리가 먼저 역사에 반성해야 할 일이나 우리는 아직 그런 적이 없다. 오히려 선비니 양반이니 하면서 칭송하기에 바빴고 현재도 마찬가지다.

전라도의 자에는 임금 이 들어 있는 글자이니 혹시 오동도에서 왕(신돈)이 나오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으로, 오동도에 다시는 봉황이 들지 못하도록 오동나무를 모조리 베어 버렸다고 한다.

 

 

 

이러한 오동도의 역사적 바탕이 토끼와 거북이의 설화를 만들게 했다. 오동도에 가보고 싶은 육지에 사는 토끼가 바다에 사는 거북이에게 좋은 선물을 주겠다는 약속을 하고 오동도를 다녀왔다. 그러나 토끼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껍질을 벗겨져 죽게 된 토끼는 토신(土神)의 도움으로 목숨을 구하고 현재의 보슬보슬한 털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는 오동도만의 설화를 전하고 있다.

오동도를 품은 여수는 보편적 가치를 추구한 역사와 더불어 이 나라를 구한 구국의 성지이다. 임진왜란 당시 최후의 보루이자 결코 무너지지 않는 방파제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해낸 여수가 없었으면 이 나라가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수가 있음으로 이 나라가 있을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섬에 숨은 역사와 과거를 되돌아보지 않고 있다. 아니 애써 외면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제 새로운 미래를 위해 뒤를 돌아보자! 오동도에 오동나무가 가득 찬 날 우리는 오동도에서 새로운 희망을 볼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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