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 역모론, 죽도(竹島)
벌써 글을 쓰기 시작한 지가 2년이 넘어간다. 독자들은 왜 전라도의 섬만 쓰느냐고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 섬의 70%가 전라도에 있으니 당연한 것이고 또한 역사적 가치를 지닌 섬은 거의 전라도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은 다른 섬을 소개하고자 한다. 우리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죽도(竹島)이다. 다케시마라고 하는 일본이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는 동해에 있는 섬이 아니다. 바로 전북 진안에 있는 금강 상류에 위치한 내륙에 있는 섬이다. 정감록이나 홍길동전, 조선왕조실록에서도 섬이라고 하면 혹시나 반란을 획책하는 곳이 아니냐는 의심의 눈길로 섬을 보는 것이다. 강화도와 진도 그리고 완도의 역사 때문이었을 것이다.
뎃뽀(鐵砲, 조총)는 1543년 일본에 처음 전파된 새로운 무기로 당시의 세상을 바꾸었다. 그 뎃뽀가 침략에 처음 사용된 곳이 1555년 5월 18일 지금의 완도 가리포였다. 중국이 영국의 대포에 무너졌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 신무기를 몰랐던 조선은 필연적으로 패할 수밖에 없었다. 세상이 변하고 있는데 변화를 몰랐던 조선은 세상의 변화를 처음으로 참담하게 맛본 것이다. 600여명 달하는 수많은 전라도 사람들이 무참하게 세계최초로 조총에 의해 대량학살 당하고 왜구들이 한양도성까지 진격하겠다고 하자 전국은 공포에 휩싸였다. 그 후 선조 20년 1587년 2월 27일 왜구들이 또 조총을 들고 침범했다. 신무기로 무장한 왜구들은 선박을 이용하여 고창, 군산까지 해로를 이용하여 올라가고 육지에 상륙하여 약탈을 자행하였다. 먹을 것을 거두어들여 아무 것도 없게 만드는 청야(淸野)와 성에 들어가 왜구들이 물러가기만 기다리는 수성(守城) 전략으로는 도저히 감당해낼 수가 없었다. 왜구들은 조총을 앞세우고 거칠 것이 없었다. 이에 불안을 느낀 서인으로 분류할 수 있는 남치근의 아우였던 전주부윤 남언경은 급한 나머지 동인인 정여립(鄭汝立)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부탁을 받은 정여립이 선봉에 서서 고창, 금구, 태안, 완주 등을 돌면서 관군과 힘을 합쳐 왜구들을 물리쳤다. 이제까지 왜구의 조총과 싸워 이겨본 경험이 없던 사람들로서는 정여립은 그야말로 존경이 대상이 되었다. 정여립의 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정여립의 곁에 있으면 왜구로부터 안전하고 생명을 부지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죽도(竹島) 정여립은 전라도 전주 남문에 사는 현감출신 양반가문에서 태어났다. 현재 명성이 높은 전주 한옥마을 자리다. 1555년 가리포왜변과 같은 왜구침탈을 경험한 후부터는 정여립은 조선사회가 “공자의 가르침대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공자의 육예(六藝: 禮, 樂, 射, 御, 書, 數)에 능통해야 진정한 선비라고 했다. 활쏘기(射)와 말타기(御)에 능숙하며 수학(數)을 익혀 문무를 겸비한 인물이 조선사회를 이끌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조선의 유약한 선비들은 공자의 육예의 내용을 바꿔 활을 쏘고 말을 달리는 일은 힘이 들고 측량(數)하는 일도 힘들다고 빼버렸다. 대신 주역이나 시경, 춘추만 읽으면 된다고 했다. 이것은 공자가 말하는 선비와는 동떨어진 것이고 이러한 결과 왜구가 침범하여 백성들이 궁핍해지고 혼란해지는 결과를 낳았다고 진단했다. 양민들에게만 부담이 지워진 군역을 양반들도 나서서 말도 타고 활도 쏘고 자기 사회를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정여립이 왜구를 물리칠 때 양반을 물론 백정과 노비들까지도 합세해 물리쳤던 것이고 다시 거병할 때 연락할 수 있도록 만든 것이 대동계였고 당시 조정에서는 사회안정책으로 향약(鄕約) 보급에 적극 나설 때라 누구든 만들 수 있었지만 나중에 반란의 증거로 제시되었고 이 명부에 적힌 사람들은 전부 몰살되었다.
성균관 유생들도 나서서 반역할 리가 없다고 했다. 그러나 정철은 죽도를 중심으로 대동계(大同契)라고 하는 군사력까지 준비하여 반역을 준비했다고 주장했다. 정철은 스스로 선조에게 찾아가 사건의 진상을 밝히는 책임자를 자청하면서 우의정에 발탁되었다. 추국을 맡은 정철은 정치적으로 반대세력들이었던 동인들을 몰살하고 개인적으로 감정이 있는 사림의 선비까지 무차별 처형하는 조선조 역사에서 지울 수 없는 기축옥사라고 하는 살육의 역사를 만들어냈다.
그때 희생당한 호남의 선비가 무려 1,000여명으로 정개청, 이발, 백유양, 최영경 등을 들 수 있다. 사림 1천여명 이상의 처형은 조선조 아니 우리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지금도 지독하다고 알려진 진시황제에 의한 분서갱유로 처형을 당한 유생은 460여명이었다. 자국민을 상대로 정적이라는 이유만으로 세계 역사상 보기드문 대학살을 자행한 것이다. 부끄러워하고 참회해야 할 역사이다. 사림만 1,000여명이지 왜구를 물리치고자 의병에 나선 정여립의 대동계에 이름이 적힌 일반 양민이나 노비까지 합하면 2,000여명을 학살한 반인륜적 범죄행위를 ‘모반’이란 굴레를 씌우고 자행한 것이다.
정여립을 선조에 추천한 율곡 이이는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고 또한 정여립을 천거한 노수신도 파직만 당했고, 정여립과 같이 대동계를 조직하고 왜구를 토벌한 남언경은 아무런 처벌도 없었고, 정개청 등 다수는 그 후 신원되었다는 것을 봐도 정여립사건의 조작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
인류 역사상 이런 만행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래놓고 그것을 합리화하고 정당화하기 위하여 배역(背逆)이라고 하면서 그 책임을 전라도에 전가하고 있는 것이다. 시간은 흘렀지만 정여립이 복원되어야 하는 이유를 "정여립이 반란을 준비했다고 하는 섬" 죽도가 그 자체로서 말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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