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의 섬, 선유도(仙遊島)
2022년 10월 29일, 이태원 참사로 많은 사람들이 서울 한복판에서 죽음을 당했다. 바다도 아니고 하늘도 아닌 서울 도심 골목길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영문도 모른채 목숨을 잃었다. 마냥 슬퍼하기도 그렇다. 무어라고 위로해야 할지? 뭐라고 해야 할지 도저히 생각이 나질 않는다.
425년전인 1597년 10월 29일 선유도까지 물러날 수밖에 없었던 이순신이 다시 목포 보화도(현 고하도)에 통제영을 설치한 날이다. 이순신 장군의 명량해전 대승으로 인해 그야말로 전라도 사람들은 왜구들의 분풀이 보복공격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살해당하거나 납치되었다. 독이 오른 왜구들은 곳곳에서 만행을 저질렀다. 이순신의 대승이 가져온 후폭풍이었다. 조선수군은 가진 모든 역량을 명량해전에 결집하여 승리를 쟁취했지만 그 승리를 이어나갈 여력이 없었다.
총도 화살도 군사도 또한 싸울 무기도 없었다. 그래서 도망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처참한 환경에 놓였다. 수많은 전라도 사람들이 ‘하늘의 신선’이 되었다. 그리고 이순신은 거센 칠산바다를 건너 고군산도의 선유도에 도착하여 12일 동안의 정비기를 가지면서 선조임금께 명량해전의 승전을 알리는 장계를 썼다. 조선수군이 궤멸할 수도 있었지만, 선유도에서 다시 부활을 꿈꾸고 남하하여 결국은 7년의 임진왜란을 마무리했다.
신선이 놀았다고 해서 선유도라고 흔히들 말한다. 그러나 ‘仙遊’라는 단어는 ‘죽음’의 다른 이름이다. 귀인이 죽거나 혹은 특별한 사람이 죽었을 때 사용하는 단어로 조선왕조실록에서도 ‘선유’란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사람들이 하늘의 신선이 되었다는 의미로 부활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전라북도 군산 앞바다에 있는 섬으로 언제부터 선유도라 불렀는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암튼 죽음 그리고 부활의 의미를 가진 섬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1123년 5월 28일 송나라를 출발한 국신사(國信使) 일행은 3개월간의 고려 방문 일정을 소상히 기록하였다. 특히 한 달 남짓한 체류 기간에 보고 들은 고려의 역사, 정치, 경제, 문화, 종교 등 거의 모든 부분을 글과 그림으로 빠짐없이 정리하였다. 이 일을 주도적으로 맡은 사람은 사절단의 인원, 선박, 예물 등을 관리하는 일을 맡았던 서긍(徐兢)이었다. 서긍의 선화봉사고려도경이란 책이 군산도(群山島)란 이름으로 선유도가 역사에 처음 등장한다.
그리고 사신들을 영접하기 위해 당대 고려의 최고의 권력자인 삼국사기를 쓴 김부식이 직접 선유도까지 와서 송나라 사신들을 대접하고 개성으로 인도했다는 사실이다. 소동파와 송나라를 일방적으로 짝사랑했던 김부식이었다.
고려도경에는 구체적으로 선유도를 묘사하고 있다. “두 봉우리는 나란히 우뚝 서 있어 절벽을 이루고 수백 길이나 치솟아 있다. 문 밖에는 공해(公廨) 10여 칸이 있고, 서쪽 가까운 작은 산 위에는 오룡묘(五龍廟)와 자복사(資福寺)가 있다. 또 서쪽에 숭산 행궁(崧山行宮)이 있고, 좌우 전후에는 주민 10여 가가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당시에도 군산도가 해양항로 상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선박의 안전한 항해와 바다에서 죽은 사람들을 위한 제사를 지내는 오룡묘가 있다는 사실이다. 이 오룡묘가 지닌 전설에도 전남 강진에서 청기와를 만들어 선박으로 고려 개성으로 나르던 사람들이 안전한 항해를 빌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1232년 7월 6일, 몽골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해 강화도로 고려가 천도했다. 강화도란 섬에서 1270년 5월 23일까지 무려 38여년간을 몽골에 대항하여 고려국의 권위를 지켜냈다. 여기서 바로 선유도의 역할이 아주 지대했다. 고려 강화도가 고립되면 고려는 망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선유도를 통하여 강진을 비롯한 전라도의 식량과 물자들이 강화도로 무사하게 전해질 수 있었기 때문에 고려 강화도는 몽골의 압박을 견딜 수 있었다. 그래서 고려도경에 나오는 봉우리를 망주봉(望主峰)이라 부르고 있다. 즉 고려를 지켜낼 수 있도록 돌보는 섬이란 의미로 생각한다.
또한 선유도에는 ‘임씨할머니당’의 이야기가 전하고 있다. 한 처녀가 있었는데 오른쪽손이 꽉 쥐고 있어서 아무도 펼 수 없었다고 한다. 부모들은 손이 불편한 딸을 시집보내려고 혼처를 알아보고 처녀의 뜻과는 관계없이 혼인날을 잡았다고 한다. 결혼식 전날 그 처녀가 주검으로 발견된다. 꽉 쥐어져 있던 손을 펴서 보니 손바닥에 “왕(王)”자가 새겨져 있었다는 것이다. 왕이 될 운명이었으나 알아보지 못한 사람들의 극성 때문에 왕이 되지 못하고 죽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처녀를 기리는 제사를 매년 선유도에서는 지내왔다는 것이다. 그 전설이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왕을 지켜내지 못하고 몽골에 무참히 짓밟힌 고려사람들의 이야기가 처녀의 이야기로 전해오는 것 같다. 선유도라는 천혜의 중간기항지, 물자수송로가 없었다면 38여년간의 섬에서 몽골에 항전한 기록은 없었을 것이고 선유도 덕분에 역사의 정통성을 지켜낼 수 있었다고 본다.
선유도는 부활의 의미를 가득 담고 있다. 경치 좋고 물이 좋아 팔자 좋은 사람들이 신선처럼 놀고 먹고 좋아 즐기는 자리가 아니라, 끈질기게 생명력을 이어가려는 사람들의 죽음을 위로하고 보듬는 섬으로 다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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