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마다 생일, 생일도
날마다 새로 태어나는 섬이 있다. 날마다 생일인 섬 생일도(生日島)이다. 전라도 완도에 소속된 면단위 섬으로서는 가장 작은 섬이다. 그러나 생일도라는 이름처럼 그 섬 안에서는 날마다 새롭게 태어나는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섬의 선착장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이 생일케익이다. 그 케익에는 다른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미역과 전복이 장식되어 있다.
날마다 미역으로 생일을 축하하는 섬이다. 그러나 원래부터 생일도는 아니었다. 1454년 『고려사』에 처음 기록된 이름은 산일도(山日島)였다. 그리고 1888년 고종 25년에 생일도로 변하였다. 섬에 사는 사람들이 순박하고 갓 태어난 아이처럼 해맑다고 해서 생일도라고 했다고 한다.
키우리도 올해가 20년이 되는 해이다. 매년 축하하고 있지만 20년이 된 오늘의 생일은 더욱 의미 깊게 다가온다. 단순한 생사의 문제가 아니라 지속가능한 생존의 문을 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생일의 의미가 아닐까?
지금도 미역은 생일을 상징한다. 생일도 당제에서는 마고할미를 모시고 또한 마고할미가 가장 좋아하는 미역을 바쳤다. 키우리도 예전의 생일 기념일 때 미역국을 제공한 적이 있다. 마고할미란 마고(麻姑)와 마조(媽祖)가 이 땅에서 토속화된 이름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만 나타나는 해양여신이 마고할미이다. 항왜원조를 단행했던 명나라의 파병 이후 할미란 이름으로 통용되어 제주도의 선문대할망, 부안의 개양할매, 진도의 영등할매, 부산 기장의 마구할미 등으로 불리어지는 바다를 모시는 사람들의 안녕과 풍요를 비는 의식으로 우리 땅에서만 할머니로 나타나는 것이다.
특히나 생일도는 물살이 빠르고 수심이 깊어 좋은 미역이 나는 곳이었고 또한 궁방(宮房)에 소속되어 미역을 공납하고 각종 부역이나 군역에서 해방되는 곳이었기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당시에도 미역은 고가에 거래되었고 미역이 나는 곽전(藿田)은 아주 높은 가격에 거래되었다. 누구나 함부로 아무나 채취할 수 없었다. 무단채취하다 걸리면 비싼 댓가를 치러야만 했다.
생일도를 중심으로 미역과 전복을 채취하는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조선왕조실록』에도 “연해의 여러 고을에서 봉진하는 해산물의 진품은 모두 포작인이 채취하는 것입니다.”라고 하고 있으며, “전선(戰船)은 포작인이 없으면 운행할 수가 없습니다.”라는 기록으로 미루어보아, 이순신이 약무호남 시무국가를 말한 연유도 여기에 있었다고 볼 수도 있다.
울릉도와 독도까지 진출했다. 1882년 울릉도검찰사 이규원(李奎遠)이 만난 울릉도 외지인은 140명이었고 이 중 115명이 호남인이었다. “호남인이 제일 많은데 전부 배를 만들거나 미역과 전복을 따며 그 밖의 타도 사람은 약재 캐는 일을 위주로 하였습니다.”는 보고에서 그 실상을 알 수 있다. 그 때나 지금이나 전라도 말로 돌을 독이라 한다. 전라도 포작인들이 미역을 채취하려 가는 돌섬을 독도라고 부르면서 현재의 독도가 되었다고 한다. 홀로 외로운 섬이 아닌 전라도 포작인들이 미역을 채취하는 돌섬이 바로 독도였다.
그런 연유로 지금 전라도에 있는 섬 중에서 독도라는 이름은 가진 곳이 10군데에 이른다. 그 10군데 섬 전부가 돌로만 이루어졌다는 사실에서도 독도란 이름도 전라도 사람들이 명명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왜구들이 거문도나 청산도에 침입하면 포작인들은 생일도에 모였다. 생일도는 백운산이라는 높은 산이 있어 조망하기 쉬울 뿐더러, 수심이 깊고 해안절벽이 발달해 쉽게 접근하기가 어렵고, 또한 백운산 정상에 성(城)을 축조하여 왜구들과 대치할 수 있는 여건을 갖춘 후방기지 역할을 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백운산에 주민들 모두가 추렴하여 자신들을 지킬 수 있는 학서암(1719년)을 만들어 정신적인 지주로서 키워나가고자 했으며, 마고할미당을 만들어 미역을 바치며 풍어와 풍작을 기원하는 제를 지금까지 300년 넘게 지내오고 있다.
“한겨울에 전복을 캐고 한추위에 미역을 채취하느라 남자와 부녀자가 발가벗고 바다 밑으로 들어가 떨면서 물결에 휩싸여 죽지 않은 것만도 참으로 요행이며, 해안에 불을 피워놓고 바다에서 나오면 몸을 구워 피부가 터지고 주름져서 귀신처럼 추한데 겨우 몇 개의 전복을 따고 어렵게 몇 줌의 미역을 따지만 그 값으로는 입에 풀칠을 하면서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통해 당시의 실상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현실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마고할매에게 의지하였던 것이 아닐까? 마고할매가 지켜준다는 생각으로 그들은 삶을 영위했다고 본다. 지금은 찾기 힘들지만 생일도와 청산도 사이의 바다에 자생하는 넓미역을 채취하기 위해 생일도 및 청산도, 삼도진역(소안도, 보길도, 노화도)에는 미역을 채취하기 위한 포작인들과 포작선들로 넘쳐났다고 한다.
또한 완도군에서는 생일도를 멍때리기 좋은 곳이라고 홍보하고 있다. 청산도와의 사이에 과거 풍성했던 우리의 넓미역이 다시 돌아오기를 바라는, 또한 명나라 진린 도독이 안녕을 빌었던 마조여신에게 우리 한반도의 평화를 염원하고, 이순신장군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며 세웠던 한중우호의 상징인 진린의 청산도비를 생각하면서 물끄러미 멍하게 바라보는 곳으로 만들면 생일도는 더 풍성해지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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