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섬을 가다

완도

샘물문화 2022. 7. 26. 09:45

한반도가 나아갈 길을 제시하는 완도

완도항

완도는 그야말로 세계문화유산급 역사를 만들어낸 곳이다. 과거의 영광을 오늘에 되살려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그것을 우리는 완도몽(莞島夢)이라 할 수 있다. ‘Wando is back’이다. 과거의 화려한 영광을 오늘에 재현한다는 것이다. 한반도에서 그러한 꿈을 그려낼 수 있는 곳은 완도가 유일할 것이다. 그래서 완도해양문화복지포럼에서는 감히 완도학이라고 명명하는 것이다.

완도학이 되기 위해서는 인류보편적 가치를 가지고 역사의 원동력으로 작동되었다는 사실을 증명해야 한다. 아무런 영향력도 끼치지 못하고 만들지 못한 완도라면 ’()을 붙일 수도 없을 것이다. 완도가 중심이 되어 수많은 사람들의 삶과 생명을 유지시키는 토대가 되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바로 828년 청해진제국이 그 중심이었고 완도학의 시작이었다.

 

완도 장보고공원

호남은 김제 벽골제라는 호수(湖水)의 이남을 말한다. 벽골제는 장보고 청해진제국민들이 노예로 끌려가 강제노동에 시달리면서 만든 인공호수이다. 장보고가 청해(淸海)라는 이름으로 현재의 완도를 중심으로 인간해방의 유토피아를 건설하려고 했지만 현실의 벽에 부딪혀 살해당함으로써 좌절되었다. 수많은 사람들의 꿈과 희망을 담아 건설하려고 했던 제국은 다시 억압과 소외, 속박이라는 노예의 굴레 속으로 떨어지고 만 것이다. 그 아픔이 그대로 전해지고 있는 곳이 호남이었고 벽골제에서 신음하던 사람들을 후백제를 건설한 견훤이 해방시켜 빙그레 웃으면서 돌아가서 새 세상을 열어보라고 하면서 지어준 이름이 완도(莞島)이다. 완도라는 이름은 1145년에 만들어진 김부식의 삼국사기에도 나오는 오래된 지명이다. 청해진에 이은 새 이름이 완도인 것이고 신분제의 속박과 굴레에서 벗어나 새 세상을 열어 모두가 빙그레 웃게 만들라는 의미를 가진 완도이다.

신라가 이 땅에 끼친 최악의 유물인 골품제(骨品制)는 세계역사에서도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신분제도였다. 자국민을 상대로 혈통에 따라 종신(終身)적으로 신분에 제한을 둔 폐쇄적인 것으로 신라가 936년 멸망할 때까지 천년을 지탱한 신분사회의 제도였으며 이를 받아들여 고려의 신분제도와 조선의 신분제도로 정착되고 오늘까지도 금수저니 갑질이니 하면서 한국사회를 옥죄고 있다.

 

가리포 망궐례 행사
망궐례행사에 참가한 중국 광동성 운부시 진린도독 후손들

그러나 완도는 이 땅에서 보편적 가치를 실현하여 세계에 확실한 결과를 보여준 곳이다. 사람이 속박과 굴레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능력을 발휘할 때 새로운 세상을 열 수 있다는 것을 세계 최초로 보여주었다. 또한 완도는 한반도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장보고와 더불어 한국을 빛내는 세계사적인 인물 이순신에 의해 완도가 재조명되고 있다. 해신(海神)이라고도 불리는 장보고와 군신(軍神)이라고 평가되는 이순신이 완도를 호남의 제일가는 울타리(湖南第一藩)”이라고 하면서 약무호남시무국가라고 전라도의 가치를 평가한 출발에 완도가 있다.

장보고는 분명히 민주화와 산업화는 동시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민주화가 없는 산업화는 아무런 경제적 영향력을 가질 수 없으며, 나아가 산업화가 없는 민주화는 삶의 의미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증명했다. 우리가 1960년대와 1970년대, 1980년의 온갖 압박 속에서도 민주화를 외치면서 허리띠를 졸라맸기에 오늘의 경제대국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이지, 민주화의 노력없이 산업화만 강요했다면 오늘의 강국을 이루어낼 수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민주화와 산업화는 하나의 길임을 분명하게 보여준 최초의 역사가 바로 완도 청해진제국이었던 것이다.

일부 지역에서는 산업화에 공헌을 했다는 이유로 박정희에 대한 찬양일색이다. 그러면서 민주화에 대한 평가는 뒷전이다. 동전의 양면과 같은 민주화와 산업화가 동시에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우리는 아직도 후진국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 세계의 역사가 이를 증명해주고 있다. 박정희에 대한 향수에 젖기보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사회가 가장 혁신적인 동력을 가진다는 것을 완도는 이미 증명한 것이다.

 

완도 장보고축제
장보고기념관

청해진제국을 가능하게 해 준 것은 바로 선박(Ship)이었다. 장보고 청해진제국이 한중일을 아우르고 아랍까지 진출할 수 있는 삼각무역과 중개무역을 할 수 있게 만든 것도 해양을 횡단할 수 있는 선박의 건조능력에 있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그러한 배를 기동하고 움직일 수 있는 새로운 엔진을 개발했기에 가능했다. 바로 범포(帆布)이다. 장보고는 이 범포를 개발하여 대양의 항해에 이용한 최초의 인물이다. 이 범포(Sail Canvas)를 아랍까지 보급하였다. 장보고 이전에는 대나무나 갈대로 만든 돛을 이용했다. 새로운 선박항해 기술로 대양항해에 새로운 혁명이었다. 이븐 쿠르다지바(Ibn Khurdãdhibah, 820912)가 저술한 책에 신라와 교역한 물품으로 당당하게 등장한다. 그러한 선박과 돛을 만들 기술과 능력을 보유했기에 아랍상인과 교역했던 것이다.

왜 완도였을까? 장보고는 완도를 잘 알고 완도에서의 인적자원과 물적자원을 이용하여 충분히 성공할 수 있겠다는 결론을 내고 도전하여 세계적인 성과를 이룩해낸 것이다. 완도의 인적자원, 곧 완도사람이 가진 지식과 기술의 측면이다. 전라도 사람 특히 완도사람의 배를 만들고 배를 운용하는 지식과 기술이 1,200년전 한중일을 아우르는 삼각해상무역의 중심지로 만들었고 당시 신라 경주의 인구가 100만에 달하는 등, 신라 최대의 번영을 구가했던 것이다. 또한 이순신도 거북선을 만들고 병선을 만들 때 전라도 뱃사람들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하루아침에 격군(수군)은 만들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순신의 약무호남 시무국가라는 말의 근저에는 뱃사람 특히 전라도 사람들에 대한 보답의 의미가 강하다고도 생각할 수 있다.

 

가리포상 대장군전
가리포상 이혈총통

그래서 완도해양문화복지포럼은 장보고와 이순신의 배를 만든 황장목과 일본에서 발견되어 2017년 진주박물관에서 처음으로 전시 공개된 완도 즉 加里浦라는 글자가 또렷하게 새겨진 대장군전이혈총통를 그 증거로 보고 있다. 대장군전과 이혈총통의 실체 파악으로 청해진에 이은 가리포진의 역할이 확실하게 드러났다. 일본이 포르투갈로부터 소총제작 기술을 받아들여 뎃포(鐵砲)라는 조총을 만들어 처음 침략한 나라가 1555년 현재의 완도인 가리포였다. 조총에 의해 가리포의 군졸과 양민들 600여명이 학살당하였다. 이른바 을묘왜변이다. 개인소총이 발명되고나서 세계최초로 대량학살이 이루어진 세계사적 의미를 지닌 곳이 또한 완도이다.

 

완도군청앞 느티나무- 소총으로 인한 세계최초의 대량학살이 일어난 것을 목격했다

가리포왜변 당시 임꺽정이 가리포에 와 왜구들과 싸워 전공을 세우고 물리쳤다고 하는,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의병도적임꺽정이라는 홍명희의 소설의 무대로 등장한다. 인간해방의 세상을 찾아 가리포까지 찾아와 백정이라는 노비 신분을 해방시켜 줄 것을 바라지만, 그래서 왜구들과 목숨을 걸고 싸워 전공을 세웠지만, 백정이라는 노비 신분은 안된다는 소리를 듣고 쓸쓸하게 떠난다는 이야기의 무대가 바로 완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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