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 고하도
목포앞바다에 있는 고하도의 옛 이름은 보화도(寶花島)였다. 보화도라는 지명은 많은 사람들이 처음 듣는 이름일 수도 있다. 2012년 목포대교가 건설되고 육지가 되면서 우리나라 국도 1호선의 기점이 되었고, 우리나라 최장 최고 목포해상케이블카가 개통되면서 이제 관광전남과 관광한국을 대표할 수 있는 목(目)으로 성장한 관광목포의 중심의 되었다.
도서연륙사업으로 목포대교가 건설되면서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섬이 되었고 또한 목포해상케이블카가 설치되면서 이름 그대로 보물같은 꽃이 핀 것처럼 목포를 더욱 빛내고 있다.
보화도라는 말은 1597년 명량에서 왜구를 대파했지만 워낙 열악한 상황으로 승세를 이어가지 못하고 싸울 무기도 군량도 병사도 없어 왜구들의 보복 반격이라는 총공세에 쫓겨 일시 피난을 결정하고 군산 선유도까지 올라갔다가 다시 전열을 재정비하기 위하여 영산강 하구와 바다가 이어지는 요충지인 보화도에 108일간 삼도수군통제영을 세우고 추위에 떠는 병사들에게 솜옷을 해 입히고 목포앞바다와 영산강을 통행하는 선박에 통행세를 부과하여 부족한 군량미를 확보했던 절체절명의 이순신에게 희망을 선물했던 섬, 이순신 장군이 ‘난중일기’에 기록했던 이름이고 당시 조선왕조실록에서의 지명도 보화도였다.
명량해전 이후 다시 왜구와의 전쟁을 준비하기 위하여 이순신은 보화도에 통제영을 설치하고 큰 배는 쌀 세 가마, 중간 배는 두 가마, 작은 배는 쌀 한 가마를 거두었는데 10일 만에 1만석을 거두고 유달산에 노적봉이라는 전설을 만들었으며, 긴급한 전선과 병사의 확보에도 힘을 쏟아 전함 53척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어 수군을 2천명으로 늘려 이후 완도 고금도로 통제영을 옮긴 후 중국 명나라 진린과의 연합함대를 형성하여 왜구들을 이 땅에서 축출하는 발판을 만든 것이 바로 보화도였다. 보화도에 주둔한 이순신에게 당시 전라도 사람들의 적극적인 후원이 없었다면 아마 조선수군은 사라졌을 것이다.
보화도는 왜구와의 전쟁으로 지쳐 있는 이순신의 수군병사들에게 고려 때 문익점이 가져온 목화 솜옷이라는 따뜻한 입을 것과 먹을 것을 보급할 수 있었던 보물섬이었다. 백성들도 이순신만 따르면 생명과 재산을 지킬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겨 수많은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통행세를 바치며 이순신을 따르고 협력했던 것이다. 이순신이 약무호남시무국가라고 호남사람들에 대한 감사의 표시를 했던 것도, 난중일기에 보화도라고 표현한 것도 바로 그 때문일 것이다.
풍요로운 전라도의 중심 영산강 하구의 길목에 있는 항구로서 그 역할이 사람의 목만큼 중요하다 하여 고려시대부터 이름난 목포(木浦)를 끼고 마주하고 있는 섬이다. 과거에는 육지에서 떨어진 외로운 섬이었지만 이제는 목포대교로 연결되고 또 보화도와 목포 유달산을 연결하는 국내 최장의 해상케이블카가 설치되어 현재 운행 중이다. 해상케이블카와 목포대교로 인하여 이제 보화도는 한반도의 시작점의 중추로 우뚝 서게 되었다. 정말 기대된다.
그런데 이런 가치 있는 역사를 가진 곳을 보화도라 하지 않고 왜 고하도라 했을까? 이순신 장군이 내려준 보화도라는 이름은 놔두고 왜 고하도라 했을까? 이순신과 조선왕조실록에서 寶花島라고 불렀던 것이 1897년 목포항이 처음 개항을 했을 때는 孤下島라고 했으며, 동아일보에는 1928년에 古下島라고도 하였고 1937년부터 高下島라고 한 것 같다.
유달산 정상을 바라본다. 굳은 기상의 바위가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는 것 같다. 푸른 바다 위에 솟은 기둥처럼 창공을 배경으로 서 있다. 그런데 내 눈을 의심했다. 유달산 높은 바위 아래 “부동명왕”(不動明王)이라는 대동아공영권을 주창하면서 침략을 정당하다고 강변하는 조각상이 있는 것이다. 일종의 군목(軍牧) 역할을 했다. 전쟁의 신이 있는 산 아래 있다고 해서 고하도(高下島)라고 했다 한다. 특히나 조선인의 땅과 집을 물건(物件)으로 만들어 매매할 수 있게 한 토지와 임야 조사사업 당시 반일이나 항일적인 이름은 없애거나 변조하여 지명을 만들었고 또한 항일에 관련된 유적은 대대적으로 파괴하거나 훼손, 도굴하였다. 일제 강점기에 벌어진 참상이다. 이를 근대화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1905년 목포신보의 주필을 지내고 경성신문 사장을 역임한, 식민지근대화론을 쓴 아오야기(靑柳網太郞)가 “1592년 풍신수길의 정한(征韓)과 1910년 이등박문의 합병(合倂)이 다르지 않다”고 하면서 한반도를 침략한 속성은 같으나 지난날의 실패를 거울삼아 성공하기 위해서 조선을 내선일체 근대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하고 이를 일제강점기에 적용했다. 지금도 이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을 보면 토착왜구란 말이 나온 이유를 알 것도 같다. 그는 또한 1922년 이조사대전(李朝史大全)을 저술하여 조선왕조를 이조로 격하시켰다. 8월 17일 이조라고 칭한 것을 잘했다고 순종은 거금 200원까지 하사했다. 그로부터 유래된 이조는 지금도 이조(李朝)라고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이순신의 혼과 얼이 살아있는, 왜구를 무찌른 이순신 군대에게 솜옷과 군량미를 제공했던 우리에게는 보물섬이었던 보화도가 고하도로 바뀌면서 일제는 면방직공업의 원료공급원으로 고하도에서 육지면의 시험재배가 성공하자 면화재배를 조선에 강요하여 수확된 면화를 전량 일본으로 가져갔다. 수탈이었다. 재래종 면의 생산은 완전 중단되고 일제가 필요로 하는 육지면만을 강제로 재배하게 된 아픈 역사의 시발점이기도 했다.
이제 고하도라는 지명을 보화도로 바꾸는 것이 오늘의 입지에 맞을 것 같다. 해상케이블카가 건설되어 새로운 관광이정표가 되고, 목포대교의 완공으로 국도1호선의 출발점이 된 이 섬을 다시 출발한다는 의미로 일제 잔재를 청산하고 이순신 장군의 가치를 드높이는 이름인 보화도라고 하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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