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광 설도
눈(雪)은 겨울을 상징한다. 언제부턴가 전라도에는 눈이 뜸해졌다. 기후가 변화하면서 아예 눈이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 눈으로 이름을 가진다는 것은 극히 드물다. 특히나 남부지방인 영광에 설도(雪島)라는 섬이 있다고 해서 놀랐다. 어찌하여 눈의 섬이라는 설도가 존재하게 되었을까?
지금은 영광과 무안을 연결하는 칠산대교가 개통되어 많은 관광객이 오가는 길목에 설도가 위치하여 젓갈타운 및 회센타 등이 들어서 있으나 과거에는 와도(臥島)라 했으며, 일제강점기에 제방을 쌓아 간척지가 되면서 섬의 모습은 사라지고 그때부터 설도가 되었다고 한다. 눈이 그렇게 많이 내리지 않는 전라도에 설도라는 이름을 가진 섬이 있다니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다. 설도 주위를 탐방하다 보니 금방 느낌이 온다. 와신상담의 와도요, 설분신원의 설도라고 하니 딱 들어맞는다. 하얀 눈이라는 설만이 아니라 덮다 혹은 되갚다는 뜻으로 사용되는 설이라고 하니 이해가 된다. 치욕을 되갚는다는 설욕(雪辱)도 눈설자를 쓴다.
그 설도 부근에는 수은 강항 선생이 왜구에게 납치되었던 논잠포가 바로 뒤에 있다. 논잠포에서 납치되어 설도를 지나 일본으로 납치된 것이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라는 전쟁은 일본 30만, 조선 30만, 그리고 명나라 10만을 합쳐 70만의 대군이 격돌한 소용돌이 속에서 10만의 피랍인이 발생했다. 경상도와 전라도의 피해가 극심했으며 수많은 문화재와 유물들이 약탈당하고 파괴되었다.
이 와중에서도 강항은 자신이 겪은 참상을 기록하면서 앞으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 위해서 선비의 도리로서 상소를 올리고 극복할 수 있는 방도를 찾는 글을 썼다. 강항의 ‘간양록’이다. 단순한 일기식이 아니라 일본의 전쟁범죄를 고발하고 극복하는 방안까지 제시한, 그것도 종6품 선무랑, 요즘으로 한다면 계장급에 해당하는 말단관리가 애국심과 절의로 기록한 역사의 산증거이다.
역사는 단순한 기록이 아니다. 소금과 등대 역할을 한다. 그러한 기록을 전란 7년 중에서, 10만명에 달하는 피랍인 중에서 강항을 비롯한 오로지 전라도 사람들만이 왜구의 전쟁범죄를 고발한 것이다. 나주 출신 노인의 ‘금계일기’와 영광 묵방포에서 피납된 정희득 일가의 ‘해상록’이 그것이다. 하지만 조선 정부 차원에서 전란을 평가하고, 실상을 파악하고 수습하기 위한 기록은 전무하다. 유성룡의 ‘징비록’과 피난 갔던 유성룡 아들의 ‘임진록’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피난의 기록이고 조선 내부의 피해기록이다.
1543년 일본은 조총이 포르투갈로부터 처음 들어왔다. 일본은 조총을 들고 반중친일(反中親日)을 강요하기 위한 정명가도라는 명분으로 조선을 침략했다. 임진왜란이다. 일본과 조선은 서로 승리했다고 주장한다. 조선은 왕조를 지켜냈으니 승리라고 하고 일본은 정한론을 내세우며 무사도를 뽐냈다고 의기양양했다. 그래놓고 일제강점기 내선일체와 황국신민을 주장하면서부터 정벌이 아니라 진압(役)이었다고 하고 있다. 결론은 정명가도나 대동아공영이라는 일제의 논리는 한마디로 반중친일을 강요한 것이다.
전라도 영광 사람 강항은 일본의 음흉한 속내를 내버려 두지 않았다. 조선의 종6품 하급관리가 일본이 무사도(武士道)라고 자랑하는 사무라이들이 저지른 고의적이고 계획적인 범죄행위를 준엄하게 꾸짖고 있다. ‘조선왕조실록’ 1599년 4월 15일의 기록을 보면 피난 중이던 강항의 어린 아들(용)과 딸(애생)까지 그리고 6살과 8살 먹은, 10세의 어린 친척 아이들이 죽어가는 것을 보았다. 수많은 노비와 부녀자들이 아무런 이유도, 잘못도 없이 사무라이들에 의해 무자비하게 살해되어 “어지러이 쌓인 시체가 산과 같고, 울음소리가 하늘에 사무쳐 바다 조수도 역시 흐느꼈다”라고 울분을 토하였다. 그러나 그는 전혀 굴하지 않았다. 연약한 민간인 아녀자들에게도 서슴지 않고 범죄를 저지르고, 도덕과 윤리라곤 찾아볼 수 없는 행위를 자행하는 일본 무사들에 대한 증오의 발로로써 “살모사와 물여우의 소굴”이라고 일본을 칭했다.
무엇보다도 강항은 정말 중요한 사실을 기록했다. 어떤 것보다도 역사가 높이 평가해야 할 기록이다. 조선인의 코와 귀를 베어다가 그것을 승리의 증거로 치부했다는 것을 처음 기록한 것이다. 일본에 납치되어 일본 쿄토의 대불사에 안치된 비총(鼻塚)을 목격하고 제사를 지내면서 몸서리쳤다. 코와 귀가 잘려 아우성치고 울어대는 어린아이들의 소리가 천지를 진동했고, 전쟁에 전혀 간여하지도 않는 비무장 민간인을 무자비하게 잡아다가 귀와 코를 베어 일본 본국으로 가져가 승리의 증거물로 삼는 비윤리적이고 인류의 보편적 가치에 반하는 범죄를 뻔뻔하게 자행하고도 반성이 전혀 없는 일본을 준엄하게 꾸짖었다. 아마 강항의 기록이 없었다면 일본은 이것마저도 부정하였을 것이다. 일본현지에서 목격하고 제사까지 지낸 강항의 기록으로 오늘 우리는 일본이 강요한 반중친일 논리의 실상이 범죄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강항은 조선의 선비로서 절대 왜구에 굴하지 않았다. 칼에 찔린 흔적이 얼굴에 있으면 용맹한 사나이라 지칭되어 중한 녹을 얻고, 칼자국이 귀 뒤에 있으면 달아나기를 잘하는 자로 배척을 당한다는 일본 사무라이들의 본질을 본 것이다. 그들과 상종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조선의 의복을 입고 적에게 굴하지 않았다. 오로지 탈출하여 왜구들을 이길 수 있는 길만을 생각했다. 그리고 만난 사람이 풍신수길의 강학이자 덕천가강 휘하의 이론가였던 후지와라 세이카였다. 풍신수길의 힘에 의한 무력통치를 끝내고 도덕과 윤리에 의한 문(文)의 지배를 확립하려는 덕천가강의 새로운 구상에 참모역할을 하고 있던 실세와 강항이 연결되어 일본에서 조선으로 귀국할 수 있었다. 일본 납치 당시에도 조선으로 돌아올 생각으로 일본의 실상을 낱낱이 기록한 강항! 바로 설도의 정신을 말해주고 있다.
소금과 등대 역할을 한 신령스러운 빛, 정신적인 맥이 흘러내리는 영광 논잠포 앞바다의 섬은 과거에는 와신상담의 ‘와도’였고 지금은 치욕을 되갚자는 ‘설도’로 변해 있다. 변하지 않는 염산의 소금과 거세지만 풍요로운 칠산바다가 어우러지는 가장 한국적인 맛, 젓갈의 섬이 되었다. 강항 같은 선조들의 빛으로 다시 일어선 우리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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