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당도
전라도 남쪽 완도 고금도에 속해 있는 조그마한 묘당도라는 섬을 아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작지만 전라도에서 가장 위대한 역사를 가진 섬이다. 중국과 한국이 처음으로 연합하여 일본을 물리친 거점이었다. 그러한 연유로 일제강점기 때에 반일유적파괴사업의 일환으로 진린과 이순신이 만들었던 고금도 삼도수군통제영과 진린의 조명연합수군 대본영의 유적들이 사라지기 시작하여 이후 말끔하게 사라졌다. 진린이 만든 관왕묘는 바다 속에 쳐박혔고 유적과 시설들은 원형대로 남아있는 것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겨우 조선 정조 때에 세운 탄보묘비와 우물터만이 존재할 뿐이다. 진린이 만든 묘당도의 관왕묘도 원형대로 찾아볼 수 없다. 진린의 흔적조차 말끔히 사라졌다. 그렇게 잊혀져 갔다.
명나라 진린 도독과 조선 이순신 장군 덕택에 일본과의 7년에 걸친 왜란은 끝났다. 이로 인해 명나라에 대한 조선의 재조지은이라는 사대사상은 제왕학은 물론 조선의 통치논리로까지 발전하여 명나라를 부정하는 것은 배은망덕(背恩忘德)이자 이단(異端)이며 나아가 척사(斥邪)의 대상으로 성리학이라는 학문의 기초에 깊숙이 들어앉아 전 조선을 휘감아버렸다. 어느 누구라도 이 성리학이라는 지배논리에서 벗어날 생각을 감히 할 수 없었다. 조선 지배계층의 지배논리로 상대방을 억압하는 진영논리의 기반이 되었던 것이다.
왜 이순신과 진린은 고금도를 전략적 거점으로 선택했을까? 이순신도 명장이고 또한 중국 명나라 진린도 뛰어난 전략전술가이다. 아무런 이유없이 고금도를 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위대한 두 장군 이순신과 진린이 선택한 고금도 대본영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위대한 두 전술전략가들이 고금도가 적절하지 않았다면 의기투합하여 연합수군을 형성하지도 못했을 것이고 새로운 지역을 선정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순신과 진린 두 장군은 고금도를 선택하여 7년간의 전쟁을 마무리하였다. 거기에는 합당한 이유가 분명 존재할 것이다. 진린은 명나라 병사들의 안전과 무운을 비는 관왕묘를 묘당도에 세웠다. 조명연합수군의 대본영으로 인정했다는 소리이다.
조총이라는 신무기를 받아들인 일본은 세계 최초로 침략전쟁을 벌였다. 세계사에서 개인소총이라는 화약 신무기를 가지고 전쟁을 일으킨 첫 나라는 일본이었고, 그 신무기를 이기지 못하고 최초로 대량학살당한 곳이 우리 조선이었다. 임진왜란의 세계사적 의의라고 말할 수 있다. 불과 400여년 전의 역사이다. 당시 일본이 가진 신무기 조총을 이겨내지 못했다면 조선은 무너졌을 것이다. 아무리 뛰어난 이순신이라고 할지래도 당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지금 대한민국은 존재할 수 없었을 수도 있었다. 임진왜란 이후 영국의 신형선박과 신무기 대형대포에 홍콩을 빼앗기고 산산조각이 나버린 중국의 사례를 보면 여실하게 증명된다. 서구열강의 신무기 대포 앞에 수많은 약소국들이 힘없이 무너졌다.
조총을 가진 왜구들은 병력충원이 쉬웠다. 몇 시간의 간단한 총기 교육만 실시하고 바로 전장에 투입할 수 있었지만 이순신의 조선수군은 그러지 못했다. 첫째 물길과 뱃길을 알아야 했고, 또한 바다에 익숙해 배멀미와 같은 고통을 당하지 않아야 했기 때문이다.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런 점 때문에 당시에 배로만 통행할 수 있는 섬이었던 고금도를 택했을 것이다. 고금도를 찾아오는 사람은 당연히 일종의 예비시험을 합격한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또한 총과 달리 활은 수많은 시간의 수련기간이 필요했다. 활을 잘 쏠 수 있는 군사를 단시간에 길러낸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래서 이순신은 총통 즉 대포의 개발에 사활을 걸었다. 즉 화약과 대포의 보급이 용이한 곳, 군사무기를 쉽게 보급받을 수 있는 곳을 선정하는 것이 가장 먼저였을 것이다. 그것이 어딜까? 바로 완도 고금도였다.
전라도 완도 전체가 조선시대 군수병기창이었고 무기보급창이었다는 소리이다. 2017년 국립진주박물관에서 처음 전시된 조선시대 미사일인 <대장군전>에 바로 ‘가리포상’이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나타난 것이다. “加里浦上” 즉 가리포에서 만들어서 납품한 무기라는 의미이다. 가리포상을 제외하고는 서울 군기시에서 만든 “軍上”뿐이다. 또한 <가리포상 이혈총통> (1583)도 분명하게 존재하여 실제 전투무기가 생산된 거점이었음을 증거하고 있다. 이제까지 밝혀진 당시 신무기에서 서울 군기시에서 만든 것과 완도 ‘가리포상’ 외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전쟁인력 보충의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대포와 관련무기의 제작과 보급에 가장 적합한 지역이 바로 전라도 고금도였다는 반증이다. 이러한 점은 전라도가 가진 또 다른 세계적인 전략가인 장보고에 의해서도 발휘된 적이 있다. 장보고는 완도를 발판으로 삼아 한중일 삼국을 아우르는 해상무역로를 장악하여 고려청자와 차(茶)를 거래하는 세계적인 대제국의 무역상으로 청해진제국을 형성한 것이다. 그 여파로 신라 경주는 100만명의 인구를 가진 세계적인 도시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의 현실은 아무 것도 없다. 황량하다. 오늘의 우리를 있게 한 역사의 산실인데 너무나 방치한 것 같다. 전라도라서 그럴까? 아니면 전라도 이순신과 경상도 이순신이 따로 존재하는 것일까? 이순신의 유해가 80여일동안 안치되었던 월송대가 묘당도에 있다. 경상도 등에는 어마어마한 예산을 투입하면서도 이순신의 시작과 끝인 완도를 방치하고 있는 현실에 과연 역사를 공부하거나 연구하는 사람들이 진실된 사람들일까 의문을 갖게 한다.
완도는 그야말로 임진왜란의 모든 것이었다. 완도가 없었으면 이 나라는 없었을 것이라는 소리가 나오는 것도 당연하다. 약무호남 시무국가가 아니라 약무완도 시무국가가 성립하는 것이다. 완도가 가진 전략적 가치가 충분한데도 그에 걸맞는 역사적 평가는 내려지지 않고 있다.
1598년 11월 19일 고금도 조명연합수군 대본영에서 출발한 이순신은 노량해전에서 전사했다. 그리고 왜구와의 전쟁도 막을 내렸다. 그러나 아직도 아니 오늘도 토착왜구라고 하는 왜구와 전쟁 중인 현실이다. 과연 토착왜구는 허상이고 망령일까? 존재하지 않는 유령을 붙잡고 싸우는 오늘일까?
정약용의 다산문집에 ‘진린의 사당 속엔 봄풀이 우북한데/아낙들이 돌을 던져 아들 점지 해달란다네’라는 의미가 다시금 다가온다. 진린과 이순신이 전략적 거점으로 삼았던 위대한 역사를 가진 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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