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섬을 가다

정가섬

샘물문화 2022. 9. 16. 09:22

세계 최초로 근대식 김양식을 했던 약산도의 정가섬(오른쪽)과 그 부근 죽도(가운데 두 섬)

정가섬

 

완도 약산도에 정가섬이 있다. 최근에는 어민접안시설 설치로 인하여 연륙되어 섬이라는 기능을 상실했다. 그러나 이 조그마한 섬이 그야말로 세계적인 업적을 이루어낸 출발이 되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한류의 열풍속에서 전라도가 만들어낸 세계최고의 히트상품인 '김'(海衣)을 만들어낸 시작이 이 조그마한 섬에서 기인한다.

조선시대 후기에는 김이 많이 양식되었다. 자연산 돌김을 채취하던 방식에서 벗어나 인공적인 시설을 통해 양식으로 김을 얻고자 함이었다. 조선시대에도 양식으로 김을 생산하던 섶꽂이 양식보다 발달한 방법은 대발을 설치하여 김을 양식하는 떼발 양식이다. 옛부터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이 양식은 완도군 조약면 장룡리에 살던 정시원(鄭時元)이 그곳 앞바다의 죽도(竹島) 부근에 어전을 설치하였는데, 그 어전의 대발에 김이 부착하여 발육이 좋은 것을 보고, 어전의 발을 모방하여 떼발을 만들어 김을 양식하면서 본격적으로 김의 양식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 죽도 부근의 조그마한 섬이었던 곳을 지금도 주민들은 정가섬이라 부르고 있다.

지금도 정가섬이 있는 장용리에 많이 살고 있는 文獻公派 鄭氏의 족보에 정시원이 실존 인물로 나오고 그의 출생연도가 정조 21(1797)으로 되어 있으므로 떼발식 김 양식법은 19세기 초엽이나 중엽무렵에 정가섬에 처음 개발 보급된 것으로 보인다. 이 방법의 개발은 김 양식업에 있어서 세계 최초의 기술 혁신이었으며, 후일 일본에서 이 정가섬의 양식법을 본떠서 뜬발식 양식법의 개발에 응용되기도 하였다. 김 양식업의 조기적 발달을 자랑하는 일본에 앞서서 우리나라에서 김 양식법이 개발되었던 것이고 그 양식법은 지금까지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조선시대 임진왜란이 끝난 후에 선조임금이 딸에게 하사하여 정명공주의 궁방전으로 있었던 약산도가 일제강점기에 토지조사사업과 맞물려 궁중재산이 조선총독부로 이관됨에 따라 조약도는 조선총독부의 소유가 되었으나 약산도에서 김을 양식하던 주민들을 중심으로 약산도를 지키자는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어 약산도의 섬을 조선총독부로부터 매수하게 되었는데 정가섬을 중심으로 김이 호황을 누려 3년만에 약산도 매수대금을 갚을 수 있었다고 한다. 이 정가섬이 조약도를 살리고 김을 세계에 알리게 된 출발지가 되었다.

 

현대식 김 가공공장

 

김이 역사상 처음 등장한 것은 해의(海衣)라는 이름으로 세종실록지리지에 전라도의 토산물로 등장한다. 완도사람들은 지금도 김을 해우이라고 부르고 있다. 완도사람들이 부르는 해우는 김을 말하는 해의에서 나온 방언인 것 같고, ‘은 김의 방언이라고 볼 수도 있으나 짐이라고 하는 명칭은 완도만이 가진 특산품이자 왕에게 진상하는 진상품, 중국의 황제에게 보내는 조공품으로서, 왕이 먹는 음식이라는 의미에서 짐()이라고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한다.

'짐'이라고 부르는 해조류를 먹는 김의 역사는 아주 오래 되었다. 기록에 나와 있는 것은 세종실록 1429719일 기록이다. 중국에 조공(朝貢)으로 바칠 물목에 미역과 다시마와 더불어 해의()와 감태, 황각 등 해조류가 포함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중국과의 조공무역에서 반드시 포함시켜야 할 물품으로 한반도에서 나는 해조류가 포함된 것을 알 수 있다. 그만큼 귀하고 중국 명나라에서 조선에 요구할만큼 중국에까지 널리 알려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세조실록 1459412일 기록을 보면 명나라 사신에게 선물로 김을 주었다는 것을 보면 김(海衣)은 당시 사회에서 귀한 물품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김은 진상품 및 조공품, 선물용으로 쓰인 아주 귀한 물목으로 관청에 의해 관리되었다. 귀한 물품인만큼 김에 관련된 부정도 있었다. 1456326일 기록을 보면 고만만호 김상(金商)은 진상하는 해의를 무역한다고 말하고 휘하 군사들에게 면포를 거두어드린 사례도 있다. 여기에서 해의의 값은 상당히 고가였는데 1650년 효종1323일의 기록을 보면 남쪽지방에 갔을 때 어공(御供)하는 해의 1첩값이 목면 20필까지 간다고 기록되어 있다. 얼마나 비싼 것인지 알만도 하다. 목면 1필에 쌀이 12두였으니 김 1첩값이 쌀 두가마니 반이었다는 말이다. 엄청난 가격이다. 이런 소리를 전해들은 조선 효종은 이후로는 해의를 봉진하지 말라고 지시하였다.

 

고려와 조선시대 궁중에서 사용하는 기름이나 꿀, 황랍, 후추, 해조류 등의 물품의 관리는 관청인 의영고(義盈庫)에서 하였으며, 1308년 고려 충렬왕 34년에 설치되어 1882년 고종 191229일에 폐지되었다. 미역과 다시마, 김 등의 해조류를 담당하는 공식적인 우리의 역사는 600여년에 달하고 있다.

그러나 귀한 것에는 문제가 발생하고 부정이 끼어든다. 김도 역시 마찬가지다. 그렇게 귀한 김을 조선시대의 탐관오리들이 가만 두었겠는가? 엄청난 부정과 부패가 자행되었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일반 백성들이 짊어졌다. 효종 때 일시적으로 해의의 진상이 금지되었지만 그 후로도 지속된 것을 알 수 있다. 이에 1726년 영조는 1030일 기한 안에 봉진하지 못한 전라감사를 대죄하지 말고 회유하라고 할만큼 어떻게 보면 진상하는 해의의 수량과 요구하는 해의의 질이 높았음을 알 수 있다.

김은 우리 한국을 빛나게 해주는 대표 해조류이다. 나아가 지금은 세계적인 식품이 된 그야말로 한류식품의 대표주자로 군림하고 있다. 한반도를 떠나 세계인의 입맛을 사로잡은 세계인의 식품으로 명성을 날리고 있다. 이 해조류의 시작은 완도에서 시작되었다.

전라도가 만들어낸 세계적인 식품인 김의 출발지가 이 조그마한 정가섬이다.

작지만 세계적인 일을 해낸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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