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섬을 가다

선도- 수선화의 섬

샘물문화 2022. 9. 23. 10:08

수선화의 섬 선도

 

추운 겨울이 가고 따스한 봄이 오면 제일 먼저 전라도에 꽃이 핀다. 매화가 꽃소식을 알려왔지만 올해도 코로나19로 인하여 모든 꽃이 피지 않은 것 같다. 바이러스가 꽃마저 밀어낸 모양새다. 그 중에서도 선도의 수선화축제가 못내 아쉽다. 2019년 봄 제1회 수선화축제를 열어 그 작은 섬에 12천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찾아들었다. 섬이 생긴 이래 최대의 인파가 몰려 수선화가 섬을 살렸다는 소리까지 나왔다. 2021년에도 수선화의 섬 선도가 되기를 바라나 현실은 그렇지 못할 것 같다.

선도에 가기 위해서는 배를 타야 한다. 무안군 운남면 신월항에서 배를 타면 30분이면 도착한다. 섬모양이 매미를 닮았다고 하여 선도(蟬島)라고 했다 한다. 선도에서 수선화를 심어 축제로까지 발전하게 된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불과 30년 전인 1990년에 고향인 선도에 귀향한 현복순씨가 수선화를 심으면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신안군을 움직여 수선화축제로 발전시키고, 아직도 시작이라 꽉 짜인 느낌은 없지만 주민 300명 정도인 작은 섬에서 역사 이래 처음으로 축제가 열린 것이다. 주민들도 상기된 모습이 여실했다. 필자뿐만 아니라 선도를 찾아준 모든 사람들에게 스스로 다가와 고맙고 감사하다고 인사한다.

 

 

많은 사람들은 수선화를 그리스 로마신화에 나오는 자신의 용모에 반해 물에 빠져 죽었다는 나르시스의 이야기로 알고 있다. 즉 나르시시즘, 어리석은 자기애, 자아도취의 꽃으로 알고 있다. 수선화의 영문명도 나르시스로 표현되고 있어 더욱 그렇게 생각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제주도에서는 설중화(雪中花)라고도 불린다. 눈 속에서도 수선화가 피기 때문이다. 강인한 생명력을 가진 꽃으로, 지조를 지킨 의리가 있는 꽃으로 상징된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하고는 별 관련이 없는 꽃이라고 생각하기 쉬우나, 수선화는 우리 땅에 들어와 아주 귀한 대접을 받았다. 조선의 지배논리였던 성리학에 근거한 군자의 도덕과 윤리를 대변하는, 지배이데올로기의 상징으로 이용된 사군자 즉, 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梅蘭菊竹]에 버금가는 귀하고 구하기 힘든 값비싼 화초가 수선화였다. 특히나 조선이 양반 위주의 계급신분 사회가 되면서 성리학이 조선의 지배논리로 정착되고 사군자와 더불어 수선화가 급부상하기 시작했다. 조선의 지배이데올로기의 기반을 만들어낸 송나라 유학자이며 성리학 이론의 집대성자인 주자(朱熹)는 수선화를 높은 지조를 지닌 존재로 상징화하였다. 그는 수선화를 노래하는 시에서 약한 뿌리 난초와 창포 부끄럽게 하고, 높은 지조는 얼음과 서리 꺾는다네.”라고 하면서 높은 지조를 지닌 꽃으로 수선화를 평가했다.

게다가 소동파와 함께 대표적인 송나라 시인인 황정견은 향기 머금은 하얀 몸은 경국지색에 가까우니 수선화는 그 아우요 매화는 그 형뻘이다.”라고 수선화를 매화급으로 자리매김했다. 이후 수선화는 매화의 동생으로 취급되면서 많은 사랑을 받는다.

성리학의 원조인 주희가 수선화를 지조의 상징으로, 그리고 황정견이 매화의 동생으로 평가하니, 눈에 다래끼까지도 좋다고 무조건 성리학을 따르던 조선의 양반들은 열광했다. 너도나도 수선화를 보고자 했으며, 높은 값을 치르더라도 소유하고자 했다. 중국을 오가는 사람들에 의해 몇 뿌리가 유통되어 고가에 거래되었으나 양반들의 욕망을 충족시키기에는 엄청 부족했고 또한 돈이 있어도 구할 수가 없었다. 얼음과 서리까지도 꺾는다는 지조의 수선화이니 그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영광이었다. 일부 상류층 그것도 왕실에서나 고이 깊게 숨겨두고 특권층만 감상하는 값비싼 화초의 대명사가 되었다. 일반인들은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었다.

어렵게 수선화를 구한 다산 정약용은 맑은 물 한 사발과 바둑알 두어 개뿐이라, 먼지 하나 없으니 무엇을 흡수할 거나.” 노래하면서 그릇에 수선화를 넣고, 바둑알로 고정하여 수경재배했다. 더불어 물만 있으면 자랄 수 있는 수선화의 특성이 당시 성리학자들에게 시각적으로 매우 강렬한 인상을 심어준 것 같다. 청렴하고 고고하면서도 화려한 꽃을 피우는 수선화를 자신들을 대변하는 꽃으로 삼고자 했던 것이다.

수선화의 가치가 급상승한 조선에서 이를 대중에게 알린 사람이 있다. 추사 김정희이다. 그래서 김정희의 꽃이라고도 한다. 추사 김정희가 1850년 제주도로 유배 당시 제주도 대정읍 일대 지천에 핀 수선화를 보았다. 김정희에게는 감동이었다. “접촉하는 지경마다 처량한 감회가 일어나서 더욱 눈물이 줄줄 흐르는 것을 금치 못하겠습니다.”라며 눈시울을 적신다. 그렇게나 칭송해대던 수선화를 제주도에 핀 것을 보았으니 어찌할 바를 몰라 편지를 쓴다.

“2월 초에 피어서 3월에 이르러서는 산과 들, 밭두둑 사이가 마치 흰 구름이 질펀하게 깔려 있는 듯, 또는 흰눈이 광대하게 쌓여 있는 듯합니다. 이 죄인이 거주하고 있는 집의 문 동쪽, 서쪽이 모두 그러하건만 (중략) 그런데 토착민들은 이것이 귀한 줄을 몰라서 牛馬에게 먹이고 또 따라서 짓밟아버리며, 또한 그것이 보리밭에 많이 나기 때문에 村里의 장정이나 아이들이 한결같이 호미로 파내어 버리는데, 호미로 파내도 다시 나곤하기 때문에 또는 이것을 원수 보듯 하고 있으니, 이 제자리를 얻지 못한 것이 이와 같습니다.”

지금 선도에 가면 그야말로 지천으로 수선화가 피어있을 것이다. 눈 내리는 춥고 황량한 거치른 들판에서도 예쁜 꽃을 피우는 수선화가 어찌 보면 전라도를 상징하는 것 같다. 앞으로 꼭 선도가 전국민이 즐겨찾는 섬으로 자리매김하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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