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혼을 깨운 임자도
전남 신안에 임자도란 섬이 있다. 이름대로 검은깨가 많이 나는 지역이라서 임자도(荏子島)라 했다 한다. 지금은 연륙교가 완공되어 배를 타지 않아도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게 되었다.
나에게는 전라도를 다시 생각케 하는 섬이다. 특히나 육지도 아닌 외딴섬에서 전라도를 생각하는 것이다. 조선 신분제 사회에서 양반 지배세력이 되고자 몸부림치다가 거부당하고 양반 기득권층 싸움에 휘말려 유배를 당한 임자도에서 체득한 예술혼으로 한국 문인화의 새로운 길을 개척한 우봉 조희룡(趙熙龍, 1789~1866)이 있기 때문이다.
1851년 추사 김정희의 하수인이라는 이유로 조희룡은 임자도에 유배되었다. 그는 중인 출신 화가로서 자신의 그림을 팔아 생계를 이어 나가야 했고, 따라서 지배층 집권세력 양반층의 인증이 없으면 그림값을 제대로 받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추사 김정희에게 애걸복걸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 연유로 김정희의 심부름도 하고 잔소리도 들으면서 어울렸는데 아무런 힘도 권력도 없는, 무시만 당한 사람이 임금에게 불충을 저질렀다고 유배된데 대해 억울함과 분노로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도저히 수긍할 수 없는 이유로 내려진 유배를 받아들일 수 없었고 전라도 임자도의 척박한 생활을 보고는 절망했다. 도저히 이겨나갈 자신이 없었다. 죽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1년이 지나면서 전라도 사람들의 순박한 공감과 자연에 감복하여 실로 위대한 변화를 겪게 되었다. 실제 유배기간은 19개월이었지만 그의 대표작 19점 중 8점이 유배기간 나왔고 특히 대작들이었다. 그의 절정기를 이루었다. 이론도 임자도에서 완성했다. 자신만의 묵죽법이 나왔고 돌을 그리는 새로운 방법을 터득했다. 그런 결과 2004년 1월에는 문화체육관광부에의 ‘이달의 문화인물’에 선정되기도 했다.
임자도라는 섬이 주는 압박감은 상상을 초월했지만 그는 그 섬에 사는 순수한 어린이들을 만났다. 아무런 거부감이 없이 아이들은 조희룡을 따랐다. 그들에게 매화 그림을 선물로 주었다. 임자도의 아이들은 매화를 본 적이 없었다. 임자도에 매화나무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매화가 그려진 그림을 본 어린아이들은 마치 큰 보물을 얻은양 즐거워했다. 그림으로 보는 매화에 감동한 표정이었다. 아이들이 퍼뜨린 소문을 듣고 온 동네 사람들이 몰려와 매화그림 얻기를 청하였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매화 그림 이야기가 이어졌다. 고난을 당하고 있는 조희룡이 그린 매화가 문자향과 서권기를 알지 못하는 무지랭이 하층민들에게 대이변을 일으킨 것이다. 그림에 전혀 관심이 없던 사람들도 조희룡의 매화 그림에 공감하며 마치 무엇인가 배우고 얻은 것처럼 말하는 것을 본 것이다. 그림을 얻으려고 먹을 것을 가지고 왔다. 그림 덕분에 조희룡은 풍족한 유배생활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기득권 진영 양반논리에 물들고 짓밟힌 자신의 예술세계를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사람들이 공감하는 그림이야말로 진정한 그림이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추사 김정희는 중인들 즉 조희룡 부류의 그림들은 문자향(文字香)이 없고 서권기(書卷氣)가 없는 가치 없는 그림이라고 평가절하하면서 무시했다. 양반의 말이 곧 ‘법’인 조선 신분제 사회에서 양반권력층에게 저평가된 그림은 헐값에 팔려나갈 수밖에 없었다. 이유는 단 하나 진짜 양반이 그리지 않았다는 것이다.그림 속에 향기와 기운을 과연 누가 집어넣을 수 있단 말인가? 상대방을 평가절하하기 위한 의도된 진영논리였다. 그러한 논리를 벗어날 방법은 없었다. 평가를 좀 더 높게 받기 위한 피나는 노력을 했지만 결코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러나 일반 대중들은 그게 아니었다. 글냄새가 없어도 그림 자체에 사람들이 공감하는 것이다. 유배의 고통, 특히나 황량한 섬에서의 궁핍함에서 나오는 처량함을 이기기 위해 그의 그림은 매화에서 시작하여 사군자를 벗어나 돌[石]로 이어졌다. 그럴 때마다 습작그림이 상자를 가득 메웠다. 임자도 100여 가구 되는 사람들의 집집마다 그의 그림이 걸렸다. 요즘말로 하면 카타르시스(catharsis)를 조희룡의 그림에서 느낀 것이다. 말하지 않아도 전해주는 묵직한 감동의 느낌, 조희룡이 전라도에서 그린 그림에 어느새 들어가 있었다.
바로 불긍거후(不肯車後)의 정신이다. 남을 모방하거나 뒤따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독창적인 공감을 얻어내야 한다는 그의 철학이 완성되었다. 그는 “스스로 창의를 내어 독자적인 성령을 표출한다”고 했다. 성령(性靈) 곧 예술혼이다.
그는 전라도의 자연에서도 배웠다. 임자도 이흑암리 앞바다에 있는 용난굴에서 용이 승천하는 듯한 고래물결을 버티며 흔들림 없이 서있는 바위와 용솟음치는 파도에서 그는 강렬함을 보았다. “날마다 바닷가에 가서 용솟음 치고 급하게 흐르며 파도치는 것을 보고 어찌 울지 않고 배길 수 있겠느냐?”고 반문하면서 용이 승천하는 듯한 강렬함을 그림에 표현했다.
또한 부드러운 날개짓으로 화려하게 나는 나비와 새들, 물고기에서도 그는 불긍거후의 의미과 더불어 예술혼의 정신을 만들었다. “깊은 밤 등잔불로 고기 줍는 전라도 사람들”을 보면서 그는 이제까지 양반이 되고자 그렇게 노력했던 자신을 반성했다. 전라도에서 스스로 체득하여 깨달은 창조의 경지였다.
그의 그림속에는 양반과 상놈이 따로 없었다. 많은 사람들은 지배층 양반들이 전라도에 유배 와서 사람들을 교화시키고 사상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하나 실제로는 전라도 사람들과 자연에서 배워갔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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