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해양치유 1번지 신지도
신지도란 섬을 사람들은 잘 모른다. 28번째로 큰 섬임에도 불구하고 신지도란 섬을 잘 모른다. 고운 모래가 깔려있는 완도 명사십리 해수욕장이 있는 것으로만 알려져 있다. 여름에만 반짝 알려질 정도이다.
신지도란 섬이 처음 역사에 등장한 것은 1470년 『조선왕조실록』에 나온다. 그 이후 완도가 가리포로 명명되어 전쟁에 대비하는 대장군전 및 각종 대포와 총통, 판옥선과 거북선 등이 만들어지고, 장보고의 청해진제국처럼 일대가 유기적으로 결합되면서 신지도도 큰 역할을 한 것으로 생각된다. 장보고 청해진제국의 본영 바로 앞이 신지도다.
우리 역사에서 섬은 사람이 사는 땅이 아니라 원악도(遠惡島)라고 했다. 멀리 해야 될 곳으로 단정했다. 사람이 살만한 곳이 못된다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왜구의 침략이 발생하면 공도정책을 시행했다. 사람이 살지 못하게 하고 죄인들이나 유배 보내는 곳으로 만들었다. 그러니 인식이 좋을 리 없었다.
신지도는 그러한 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그러한 사람들 중에도 반드시 기억해야 할 사람이 있다. 석재 윤행임(碩齋 尹行恁, 1762∼1801)이다. 많은 사람들이 잘 모른다. 1795년 『이충무공전서』를 편찬하여 이순신을 오늘에 되살려 낸 인물이다. 정조의 명에 의해 자료를 모으고 분류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윤행임은 이순신을 역사의 전면에 다시 되살리고 광주의 김덕령과 임경업을 역사에 등장시켰다.
그가 『이충무공전서』를 편찬하였기 때문에 오늘 우리는 이순신을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또한 가장 전라도를 잘 표현한 말로 “약무호남시무국가”란 말을 실었다. 이순신이 했다는 이 말이 없었다면 전라도의 진실은 감춰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보편적 가치관을 가진 윤행임의 선견지명 덕분이다. 이순신과 마찬가지로 그도 평생 ‘국가’만 있었을 뿐 친구 하나 변변하게 없었던 사람이었기에 더욱 가슴에 와 닿는 말이었을 것이다.
그가 죽기 전 마지막 일은 내노비와 시노비 혁파에 관한 건이었고 그가 직접 쓴 글에서 “‘노(奴)’라고 하고 ‘비(婢)’라고 하여 구분하는 것이 어찌 똑같이 사랑하는 동포로 여기는 뜻이겠는가?”라고 반문하면서 7만 가구에 이르는 노비문서를 거두어 돈화문 밖에서 불태우게 했다. “이로부터 이후로는 오직 천만년에 이르도록 양민들이 편안하게 생업을 영위하며 그 분묘(墳墓)를 지키고 적기에 혼인하여 자식을 낳아 날로 번성할 것이며, 농사를 게을리 하지 않아서 즐겁게 삶을 구가(謳歌)하게” 하는데 목적이 있다고 윤행임이 직접 글을 써서 인류 보편적 가치를 주장하고 있다. 양력 1801년 3월 12일의 일이다. 엄청난 일이다. 당시에 혁명이라고 할만하다. 선각자로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전봉준 동학혁명이 있기 전까지 이 땅 2천년의 역사에서 어느 누구도 하지 못했던 일을 해냈다.
그 때문에 기득권 양반층의 미움을 받아 6월 24일 신지도로 유배되었고, 그 해 10월 23일 사사되었다. 무등산에서 국가에 반대하는 사학(邪學)의 무리를 이끌고 변란을 획책하고 있다는 이유(승정원일기, 1801. 5.20.)를 만들어 죽게 했다. 인간 평등과 존중, 행복이라는 보편적 가치에 대한 기득권층의 반발로 그는 제거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윤행임은 조선 22대 왕인 정조임금이 발탁하여 정조의 분신으로 정조의 의중을 대변한 정조의 사람이었다. 이 나라를 다시 부흥케 해야 한다며 정조가 내건 “모두가 한 핏줄인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조선의 국론을 통일하려고 했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서얼을 허통하고 같은 민족이 동족을 노예로 삼는 야비한 제도를 개혁해야 된다고 주장한 사람으로서 기득권층의 반발로 죽임을 당했으나 25년 후에 복권되었다.
윤행임과 같은 시대를 살았던 정약용은 강진에 유배와서 18년동안 거주하면서 개혁과 개방으로 부국강병하고 애민애족으로 백성들을 보살피자고 하는 ‘목민심서’를 저술했다. 그러나 윤행임과는 달랐다. 목민심서 변등(辨等) 편에서 조선사회경제를 이끌어 올리기 위해서는 노비제를 다시 회복하고 일천즉천 제도로 회복시켜야만 부국강병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실사구시라는 대의명분과는 아주 동떨어진 반인륜적이고 비인간적인 당시 사회의 노비제도를 자국민이 자국민을 노비로 삼는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노비제도를 우리와 상황이 전혀 맞지 않는 중국의 예까지 들어가면서 적극 옹호했다. 결국 신라 골품제에서 유래된 일천즉천(一賤卽賤, 부모 중 어느 한 쪽이라도 노비면 곧 노비)의 우리나라 원래의 노비제도가 1731년 영조 7년에 '어미가 노비면 노비'라는 종모법(從母法)으로 확정되자 이를 ‘신해변법’이라고 하면서, 다시 원상복구 시키지 못하면 국가의 어려움을 풀 수가 없을 것이라고 하면서 이러한 종모법을 일천즉천의 노비제도로 하루빨리 고치는 것이 가장 시급하다(辨等者 日之急務也)고 주장한다.
정약용은 당시 양반사대부의 기득권층 옹호에 모든 것을 걸었다. 그것이 실사구시이고 또한 부국강병이었던 것이지 모든 백성이 잘사는 잘못된 사회제도가 고쳐지고 개선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오로지 성리학이 중심이 된 강력한 사대부의 양반사회가 올바른 사회라고 주창한, 인간의 보편적 가치와는 거리가 먼 그야말로 고리타분한 구질서의 옹호자였을 뿐이다. 사람은 세상의 올바른 철학적 가치 즉 인류의 보편적 가치로서 판단해야 하지 과거 구질서로의 강력회귀를 주장하고, 자국민을 노비로 삼는 세계 최악의 신분질서를 옹호하는 잘못된 사상가를 높이 받드는 것은 지금이라도 고쳐야 한다는 생각이다.
노비제도는 그야말로 우리의 아픈 역사이다. 그러나 그 역사가 신라라는 나라의 골품제도로서 굳혀지면서 고려와 조선까지 무려 1,500여년 동안 우리 모두를 옥죄는 간악한 제도로서 존재했던 것이다.
지금은 신지대교와 장보고대교가 건설되어 언제든지 드나들 수 있는 섬이 되었고, 외롭고 괴로운 ‘원악도’가 아닌 ‘해양치유 1번지’로 다시 태어나고 있다. 자연과 바다가 주는 힐링과 더불어 살다간 선인들의 발자취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지혜와 감동을 말없이 전해주고 있다. 전라도를 알려면 신지도는 필수이다. 여름에 신지도 명사십리 해수욕장을 가셔서 고운 모래의 백사장을 거니는 행복도 추천드린다.
'대한민국 섬을 가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죽음마저도 겸손했던, 송이도 (0) | 2022.09.29 |
---|---|
사도 (0) | 2022.09.25 |
임자도 (0) | 2022.09.24 |
선도- 수선화의 섬 (1) | 2022.09.23 |
정가섬 (0) | 2022.09.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