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마저도 겸손했던, 송이도
송이도(松耳島), 이름처럼 아름답게 느껴진다. 섬에 소나무가 많고 귀처럼 생겼다고 해서 이름했다고 하나 송이도행 페리선에서 본 섬은 송이버섯 모양처럼 멀리서는 둥글게 보인다. 보살섬이라고도 했다 한다. 칠산바다의 거칠고 거센 바다가 송이도 사람들에게 풍요와 부를 바라는 대상이기도 하고 또한 원망과 고통을 주는 실체이기도 했다.
일산도, 이산도, 삼산도 … 칠산도 연속된 이름으로 명명된 칠산바다는 행정구역상으로 송이도 관할이다. 전남 영광군 낙월면 송이도 산462번지가 일산도요, 산463번지가 이산도이다. 칠산도는 천연기념물 제389호인 괭이갈매기, 노랑부리백로와 저어새 번식지 보호구역으로 특별관리되고 있는 무인도이지만 전라도 사람들에게는 아주 친숙한 이름이다.
보살섬 송이도로 가는 새벽 배안에는 중년남자와 나뿐이다. 커다란 배에 단 두사람만 싣고 운항한다. 미안하기도 했다. 내가 이 큰 배를 혼자서 타고가면 얼마나 경제적으로 손해인가? 손님보다 선원들이 더 많은 배였다. 1월에 들어가는 송이도행은 쉬운 것만은 아니었다. 오늘이 두 번째 도전이다. 2주일 전에 들어가려다 풍랑으로 배가 휴항하는 바람에 못갔다.
자연스레 말을 걸었다. 자기는 송이도에 근무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나에게는 왜 들어가느냐고 묻는다. 나는 송이도에 ‘초분’이 있다고 해서 찾으려 간다고 했다. 그랬더니 이제까지 송이도에서 살고 있는 자기도 처음 듣는 소리라고 한다. 혹시 잘못 알고 있는 것이 아니냐고 반문한다. 송이도에서 10년을 살았어도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는 것이다. 나는 초분을 연구하는 학자들의 논문에서 그런 말을 들어 확인차 들어가는 것이라고 하는데 현지에 사시는 분이 아니라고 하니….
칠산바다의 중심 송이도에는 서해안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초분이 있다고 들었다. 사람이 죽으면 매장을 하는 것이 아니라 초분을 만들어 육탈을 시키고 뼈만 추슬러 나중에 매장을 하는 장례의식으로, 칠산바다를 관장하는 신들에게 노여움을 사지 않기 위해 정월에 사망한 사람들은 매장을 하지 않고 반드시 초분을 하여 부정을 피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완도 청산도와 여수 금오도 등에도 있었는데 지금은 사라지고 관광용으로만 만들어 놓았으나 최근까지 송이도는 실제로 존재하고 있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래서 초분을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으로 찾아 나섰다. 그런데 처음 만나는 송이도 사시는 분이 반신반의하면서 오히려 반문하는 것이었다. 요즘은 초분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이유로는 조기와 새우가 사라져 치성을 드릴만한 대상 자체가 사라진 데다 정월에 사망하더라도 자식들이 육지로 가서 장례를 치르고, 이중장제를 치뤄야 하는 초분은 번거롭기 때문에 기피하고 있다고 하였다.
그 분은 단정적으로 초분은 없다고 한다. 혹시라도 나중에 찾으면 연락을 주겠다고 한다. 그래서 그분의 권유대로 찾는 것을 포기하고 왕소사나무 군락지를 찾아갔다. 106본의 나무들이 어우러져 그야말로 영화 <아바타>에 나오는 괴이한 나무들이 현실에 있는 것 같은 신비한 모양이었다. 겨울철이 아니면 접근하기도 쉽지 않은 험한 길이었다. 잡초와 잡목 등이 어우러져 길조차 찾기 힘든 험한 곳이었지만 겨울의 혹독한 추위에 고사하여 나에게 길을 내어주고 있다.
내려오는 길에 늘어선 거대한 팽나무들이 줄지어 있는 풍광이 너무나 낯설었다. 이 팽나무들이 바로 칠산바다 신들의 노여움을 풀고 치성을 드리기 위한 어민들의 신성한 장소였다. 지금은 초라한 어촌으로 변해 있지만 과거에는 한반도 사람들의 입맛을 사로잡은 조기와 새우로 번영을 누렸던 중심지였다. 커다란 팽나무들이 그야말로 장관이다.
서해안 송이도 인근에는 과거 고려와 조선시대 조운선이나 무역선 등이 난파되어 현재 대량으로 발견되는 보물 지역이 된 것도 우연이 아니며, 또한 정유재란 시 진도 울돌목 명량해전에서 모든 전쟁물자를 소진하고 전투할 수 있는 무기 하나 보급을 받지 못해 고군산열도의 선유도까지 후퇴할 수밖에 없었던 이순신 장군이었지만, 왜구들은 이 거센 칠산바다를 건너지 못해 더 이상 추격하지 못하고 물러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만약 이 칠산바다가 없었다면 이순신 장군의 마지막 수군은 궤멸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 칠산바다가 왜구들의 추격을 막아주었던 것이다. 칠산바다 덕분에 진영을 다시 추스린 이순신 장군은 왜구들이 물러난 것을 보고 다시 내려와 고하도에다 통제영을 차리고 병력과 식량을 조달한 다음 고금도로 진출하여 명나라 진린 도독과 연합하여 조선을 침략한 왜구들을 한반도에서 몰아내는 대역전승을 거두었다.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고 하지만 이 칠산바다가 없었다면 과연 이순신은 무사할 수 있었을까?
그리고 광주로 돌아왔다. 10일 후에 문자가 왔다. 초분 사진이었다. 송이도 소장님이 드디어 여기저기를 탐문한 끝에 초분을 찾았다는 것이다. 감격했다. 한국인의 입맛을 사로잡은 국민생선 조기와 국민젓갈 젓새우를 만들기 위해 칠산바다의 눈치를 봐야 했던 송이도 어민들의 눈물과 땀이 깃들어 있는, 죽음마저도 칠산바다 앞에서는 겸손해야 했던 송이도 사람들의 정성으로 초분이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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