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우호의 가교, 청산도
청산도(靑山島)로 가기 위해 배를 탔다. 코로나-19 이전에는 주민 2,500여명이 사는 섬에 하루에 5,000명의 관광객이 드나들었으나 지금은 한산하다. 우리 키우리산악회에서도 청산도 산행을 한 적이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찾는 청산도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일까?
청산도 하면 우선 생각되는 것이 느림의 미학을 실천하는 슬로우시티(slow city)로 대한민국 최초로, 아니 아시아 최초로 2007년에 완도 청산도가 선정되었다는 것이다. ‘빨리빨리’를 외치던 한국에서 전라도 말로 하자면 ‘싸목싸목’ 차분하게 우리의 일을 처리하자고 하는 의미의, 성장 위주의 정책에서 이제는 나눔을 생각하고, 싸목싸목 절차와 과정을 중시하는 문화로 바꿔보자는 슬로건이 전국민의 공감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대한민국을 고쳐보고자 하는 일대 변혁이었다. 대한민국이 호응했다. 전국민이 응원했다. 수많은 관광객들이 찾아들었다. 이를 보고 대한민국의 많은 지방자치단체들이 너도나도 슬로우시티를 신청했다. 지금은 15개에 이르는 대한민국의 자치단체가 슬로우시티로 지정되었다. 아시아에서는 가장 많은 슬로우시티를 보유한 대한민국이 되었다.
청산도는 원래 신선이 산다고 하여 선산도(仙山島)라고 하던 곳이다. 과거부터 슬로우시티를 구가하며 살았다고 볼 수 있다.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주민들 스스로가 공동체를 형성하고 강한 유대감으로 뭉쳐 살았다. 청산도의 고인돌과 돌담, 척박한 섬의 환경에서 쌀을 수확하고자 주민들이 힘을 합쳐 세계 어디에도 없는 세계농업문화유산인 구들장논을 만들고 학문에 힘써 “청산도에서 글자랑하지 마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여유와 만족을 추구하며 살았던 섬이다.
1866년 청산도에 만호진이 세워졌다. 왜구의 침탈을 막는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여유만만하게 잘사는 사람들을 보고 세금을 걷기 위해 군진을 설치한 것이다. 청산도에 성도 쌓았다. 동헌도 설치하고 완도 가리포와 고금도진, 신지도진을 연결하는 거북선을 1895년까지 운항하였다고 한다. 이순신이 고금도 통제영을 중심으로 조명연합수군을 형성하여 왜구를 물리친 거북선이 가장 마지막까지 운항된 곳이 청산도이다. 그만큼 청산도는 한반도를 지키는 중요한 거점이었다.
청산도가 빛나야 하는 이유를 내세운다면 1795년 윤행임이 편찬한 “이충무공전서”에 이순신을 추모하는 진린도독의 비가 세워져 있다고 하는 기록에서 찾을 수 있다. 노산 이은상은 이충무공전서에 기록된 청산도가 중국의 청산도를 말한다고 했으나 최근 완도의 향토사학자들이 이충무공전서에 기록된 청산도는 지금 완도의 청산도이며, 고금도를 중심으로 청산도에도 진린도독의 500여척의 병선과 2만여명의 군사들이 조명연합수군을 형성하여 1년여 동안 주둔했던 곳이라는 점을 밝혀냈다. 완도 가리포와 고금도, 청산도는 명나라 진린도독에게도 이순신에게도 중요한 전략상 요충지이자 또한 군사들에게 군수물자와 식량을 보급하고 조달하는 대본영의 역할을 수행했던 곳이다.
이충무공전서의 기록을 바탕으로 지금 완도에서는 진린도독이 세웠다고 하는 비석을 찾자는 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상금까지 내걸고 비석에 관한 제보를 기다린다고 한다. 진린비는 앙숙(怏宿)으로 잘못 알려진 이순신과 진린에 대한 올바른 역사 평가와 한중우호를 증진할 수 있는 실마리를 풀 수 있는 단서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2017년도에는 중국의 시진핑과 우리의 문재인 대통령이 진린의 후손과 완도를 언급한 바가 있다. 지금은 진린이 세웠다는 비석은 찾아볼 수 없으나 진린비의 존재를 알리고 이를 복원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이순신과 진린의 큰 우애와 애틋한 마음을 그대로 전하는 비석으로 한중우호의 역사적 상징물이다. 완도에서는 이를 찾고, 청산도의 역사적 의미를 정립하고자 학술대회를 청산도 현지에서 2021년 11월 26일 개최한다고 한다. 늦었지만 바람직한 일이다.
진린이 말하길 “내가 밤이면 천문을 보고 낮이면 인사를 살피는 바 동방에 대장별이 희미해가니 멀지 않아 공(이순신)에게 화가 미치리이다. 공은 어찌하여 무후의 기도로 예방하는 법을 쓰지 않습니까”하니 이순신이 답하기를 “이 왜구들을 무찌른다면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겠습니다”라고 답하고 노량해전에 출전하여 목숨을 바쳤다는 아름다운 우정의 이야기를 비석(碑石)으로 새겨놓았다는 것이다. 서로 반목하고 앙숙처럼 홀대했다면 이러한 일이 가능했을까?
진린비와 더불어 또 하나 눈여겨볼 곳이 있다. 동쪽 생일도가 보이는 상산포 항구(지금의 신월항 입구)의 산등성이에 있는 당(堂)이다. 다른 곳과는 달리 이 당집에는 젊은 여자상를 모시고 있다. 할미나 할망 등 나이든 사람을 신으로 모시는 곳과는 달리 젊은 처녀의 얼굴을 당집에 모시고 있는 것이다. 매년 정월 보름날에 주민들의 안녕과 풍어를 위해 제를 지내고 있다. 진린도독이 수군의 건승과 무운을 빌기 위해 가져온 마조신앙의 변신이 아닌가 생각된다. 순전한 필자의 생각이지만 이곳 당집이 있는 곳에 진린도독의 비가 세워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한반도에서 마조신앙은 진린도독의 수군이 순망치한의 입장에서 조선을 도와 왜구를 물리치기 위해 고금도에 도착하면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고금도 관왕묘가 이를 말해준다. 매일 밤이 되면 해안에서 불을 피워 어선이 조난하는 것을 막았고 바다에서 조난당한 사람들을 구한 중국의 상징적인 인물인 16세 젊은 여성인 마조(媽祖)를 신으로 모신 사당이다. 우리로 봐서는 나이가 지긋한 마고할미나 영등할망과 같은 역할을 한다. 지금은 관왕묘도 사라지고 마조신당도 사라지고 없지만 중국의 진린도독과 이순신의 우정의 비석은 청산도 어딘가에 분명 있을 것 같다.
청산도는 앞으로 대한민국이 나아갈 방향을 말없이 제시하고 있다. 청산도를 다녀온 사람이라면 분명 느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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