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섬을 가다

재조지은(再造之恩), 해남도

샘물문화 2022. 10. 4. 14:05

재조지은(再造之恩), 해남도

 

해남도(海南島)라는 섬이 있다. 사람이 살지 않는 아주 조그마한 고금도 윤동 옆에 있는 섬이다. 이름 없는 섬이라고 해도 하등 이상할 것이 없는 섬이지만 해남도라는 거창한 이름을 달고 있다. 언제부터였는지 확실하지 않지만 해남도 옆에 살고 있는 고금도 윤동 사람들은 아직도 똑똑하게 기억하면서 전하고 있다.

임진왜란 때 진린 장군이 거느린 명나라 2만수군이 진주했던 곳이 바로 이곳이며, 무사귀환과 전공(戰功)을 빌기 위해 묘당도에 관왕묘를 세우고 또한 고향인 광동성 해남도를 생각하며 이름붙인 섬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랑께 묘당도와 고금도 조명연합수군의 본영이 있던 덕동 사이에 존재하여 수많은 병사들이 모여 취식을 한 쌀을 씻은 물이 흘러내려 긴 바다로 흘러가 왜구들이 감히 범접하지 못했고, 횟가루를 흘러보내 쌀뜬물로 위장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고 이곳 윤동마을 정병을 이장은 바로 엊그제 일인 듯 말한다.

2014년 중국 시진핑 국가주석이 한국을 방문하여 “400여년전 양국 백성들이 일본의 침략에 맞서 싸웠다. 명나라 등자룡 장군과 이순신이 장군이 전사하였으며 명나라 진린 장군의 후손들이 아직도 한국에 살고 있다고 과거 역사를 거론하며 고금도를 들추어냈다. 이에 호응하여 2017년 중국을 국빈방문한 문재인 대통령은 베이징대학에서 완도군에서는 임진왜란 때 왜군을 격파한 조선의 이순신 장군과 명나라 진린 장군을 함께 기리는 사업을 전개하고 있으며, 한국에는 지금 진린 장군의 후손 2천여 명이 살고 있다.’라고 하여 전라도가 역사의 전면에 재등장하고 재평가 받을 수 있는 기회가 만들어졌다.

유성룡의 징비록을 보면 임진왜란시에 어떤 곳에서는 아버지와 아들, 남편과 아내 사이에 서로 잡아먹기도 했다. 어디에고 해골만이 잡초처럼 무성했다고 하는 피폐하고 참혹한 현실에서, 얼마나 번화한 섬이었는지 기록은 섬 안의 민간인도 수만호에 달했고 군대도 한산도 시절의 10배가 되었다고 했다.

 

 

고금도에 이순신은 1598년 삼도수군통제영을 설치하고 명나라 진린도독과 함께 군사작전을 펼친 조명연합수군의 본부였다. 원균의 칠천량 대패로 조선수군이 궤멸당하면 명나라도 위험하다는 판단에서 진린은 전선 500여척에 2만명의 군사를 이끌고 고금도 덕동에 본영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해남도가 진린 병사들의 향수를 달래주었을 것이다.

고금도는 그야말로 왜구를 무너뜨린 조선의 마지막 힘이었다. 왜구를 명나라와 힘을 합쳐 물리친 것이다. 이를 잊지 못해 재조지은이라 하면서 감사해하고 명나라가 망한 200년 후까지도 대보단을 지어 기념했으며 나아가 성리학의 기반이 되어 모든 진영논리를 압도했다. 이를 못마땅해 한 것이 일본이었다. 그래서 중국이라고 하면 사대(事大)라고 하면서 무조건 비하하고 깎아내렸다. 이에 편승하여 해남도도 모든 것이 왜곡되어 버렸다.

진린의 관왕묘는 일제가 파괴하여 바다에 버렸으며, 원래의 주인인 진린은 사라지고 이순신과 이영남 가리포첨사가 배향된 충무사(국가사적 제114)로 변질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조그마한 관왕묘비만이 남아 옛날을 증거하고 있을 뿐이고 묘당도와 덕동 사이의 해남도가 과거를 말해주고 있다. 거대하고 화려한 고금도의 흔적은 사라지고 책속의 이야기로만 남아있는 현실이다.

 

묘당도 관왕묘 충무사 월송대 그리고 염시등(뒤의 논이 과거에는 염전이었다고 한다).

 

그 중 염시등이야기가 전해진다. 고금도에 이순신이 통제영을 설치하면서부터 소금[]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지금의 해남도 근처이다. 엄격하게 통제된 지역으로 아무나 드나들 수 없었고 여기에서 일하는 것이 자랑거리였다. 염시등에서 만나 결혼하면 잘살게 된다는 입소문이 나면서 많은 처녀총각들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좋은 혼처를 만나고 싶거든 염시등에 가보라는 말이 지금도 전해지고 있다. 바닷물이 빠지면 드러나는 갯뻘이 과거를 말해주고 있다.

 

월송대

 

이순신 장군이 노량에서 전사하여 진린에 의해 고금도로 운구되어 고금도 묘당도 월송대에 가매장되었다. 등자룡과 같이 월송대에 묻혀 있다가 이순신 장군은 충남 아산으로 가고 등자룡은 조선 선조임금의 배웅을 받으며 명나라로 운구되었다. 등자룡과 이순신의 체취가 그대로 배어있는 묘당도와 해남도이다.

왜란이 끝난 후 고금도에서 과거시험[庭試]까지 시행했다. 전라도에 대한 보답으로서 일종의 출장 채용시험이었다. 왜구를 방어하는데 수고한 사람들에게 위로와 격려할 목적으로 실시하여 문과 이명준 외 10인과 무과 신경유 외 1,600여명을 선발하고 1605년까지 통제영을 유지했다.

진린은 고금도에서만 주둔하다가 명나라로 돌아갔다. 그 후손들이 고금도에 들어와 살다가 지금 해남의 황조동에 정착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2,000여명의 광동진씨가 진린의 후손이다. 평소 조선에 다시 가고 싶다고 한 진린의 유언에 따른 것이다. 이런 진린을 표독스럽고 욕심 많은 악인으로 명예를 훼손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 볼 필요가 있다.

 

해남 황조동 황조별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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