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배 그 혹독함, 흑산도
과거 우리나라에서 섬은 대부분이 형벌(刑罰)의 장소로 이용되었다. 바다로 둘러쌓인 섬들은 육지와의 왕래를 차단하고 또한 외부와의 소통을 막는데 적격이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당시 형벌의 기준인 ‘대명률’에 의한 형벌집행에도 최적의 명분을 제공한 것이 바로 섬이었다. 또한 고려 강화도의 기억과 진도 고려국의 기억 때문에 섬은 집권층에게는 기피의 대상이 되었고 또한 홍길동이나 정감록처럼 새나라를 꿈꾸는 사람들에게는 이상(理想)으로 그려지기도 하였다.
전라도에는 섬이 많다. 현재 유인도 301개, 무인도 1,766개가 존재한다. 우리나라 섬은 총 3,348개나 된다. 사람이 사는 유인도가 472개이고 무인도는 2,876개라고 한다. 전라도가 차지하는 섬의 비중이 압도적이다. 당연히 전라도 하면 섬을 말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우리나라는 인도네시아(1만5천여개), 필리핀(7,100여개), 일본(6,800여개)에 이어 세계 4번째로 섬이 많은 나라다.
유인도 대부분은 임진왜란 이후 개방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대명률에 근거한 삼천리 유배와 위리안치(圍籬安置)에 적합한 탱자나무가 자생한다는 이유로 유배지로 활용되어 남쪽 전라도의 섬들은 거의가 유배자들의 흔적을 지니고 있다. 그 중에서 최고는 이름그대로 역시 흑산도이다.
흑산도는 846년 일본승려인 엔닌의 기록 "입당구법순례행기"에 나타난다. 백제의 셋째 왕자가 은거했고 300-400가구가 거주하고 있다고 기록했다. 2022년 현재 흑산도 인구가 1,898명이니 장보고 당시 흑산도 거주인구를 보면 장보고의 해상왕국의 중간거점으로 이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세종실록지리지(1454)에는 “영산은 본래 흑산도인데 육지로 나와 남포강가로 옮겼다”고 하여 영산강의 유래를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1123년 송나라의 사신 ‘서긍’의 『고려도경』에서는 사신들이 묵을 수 있는 관아가 있고 봉수대가 있어 봉화가 오르면 왕경까지 도달한다는 기록으로 보아 중국과 우리와의 국경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몽골이 고려를 압박하여 남송(南宋)이나 일본(日本)을 공격하기 위해 몽골장군 톡토르(脫朶兒)까지 1268년 10월 흑산도를 방문하여 병선과 병력을 검열하고, 전진군사기지를 설치하여 흑산도의 풍부한 소나무와 목재를 이용하여 선박을 건조하고 수리하는 항구로 이용하였음을 『고려사』는 말해주고 있다.
그리고 “머나먼 그 서울을 그리다가 검게 타 버린…”이라는 흑산도 아가씨의 이미자님의 노래처럼 진짜 속이 까맣게 타버린 사람이 있다. 흑산도에 유배온 손암 정약전이다. 손암 정약전은 다산 정약용의 형이다. 흑산도를 몹시 싫어했다. 그래서 ‘자산도’라 이름을 바꿔 불렀다. 16년간 유배생활을 하면서 그가 155종의 흑산도에 서식하는 해양생물 백과사전인 “玆山魚譜”가 이를 말해주고 있다. 다시 말하면 ‘흑산어보’의 다른 이름이다.
흑산도 사리에 가면 그의 유배지가 있다. 거기에 복성재(復性齋)가 있다. 흑산도에서 속이 시커멓게 타서 항복을 한다는 의미이다. 명나라 일변도의 성리학풍을 바꿔보자는 실학(實學)을 주장했다는 이유로 진영논리의 피해자로 정약전은 흑산도로 유배를 온 것이다. 흑산도의 혹독함을 겪고나서 그는 사학(邪學)을 버리고 성리학으로 다시 간다는 항복의 표시로 “복성재”를 만들었지만, 그는 끝내 해배되지 못하고 흑산도에서 생을 마쳤다.
그러나 정약전은 흑산도의 홍어장수 문순득의 표류기를 대필하여 홍어를 알리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표해시말(漂海始末)이다. “흑산도(黑山島) 사람 문순득(文順得)이 표류되어 여송국(呂宋國)에...”이라는 기록을 조선왕조 순조실록(1809년 6월 26일)에서 찾아볼 수 있다. 문순득은 흑산도에서 살았고, 당시에도 홍어는 흑산도를 그리워하는 영산포 사람들과 홍어의 맛을 아는 전라도 사람들이 원하는, 이윤과 판로가 확실하게 보장되었기에 많은 돈을 많이 벌기를 바라는 젊은 25살의 그는 1801년 12월 눈보라가 휘몰아치던 바다에서 홍어를 구하려 나섰다가 흑산도 근해의 거센 풍랑에 그만 표류를 당하고 말았다.
이후 돛대가 부러진 채로 바다에 표류하던 배는 오키나와에 도착하게 되고 1802년 10월에 드디어 오키나와에서 청나라로 떠나는 사신 일행과 함께 출발했지만 거센 파도로 또 표류하여 도착한 곳이 바로 여송국(필리핀)이었다.
필리핀에서 몇 개월을 지내면서 그곳의 생활모습과 언어를 빠르게 습득한 문순득 일행은 중국 상인들의 쌀 무역을 돕는 등 다양한 경제활동을 통해 돈을 모아 여비를 만들었고, 드디어 청나라를 거쳐 1805년 1월 8일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게 되고, 조선왕조실록에도 기록되었다.
또한 1810년경 겨울이면 흑산도 인근 우이도에 머물렀던 정약전에게 문순득은 그 동안의 전말을 구술하고 책으로 만들었고 1979년에야 그 존재가 밝혀진 귀중한 자료이다.
삭힌 홍어와 삶은 돼지고기를 묵은 김치와 같이 먹는 것을 ‘홍어삼합’이라고 하고, 여기에 막걸리와 같이 먹으면 ‘홍탁’이라고 한다. 흑산도 연근해는 홍어의 생식활동장이다. 홍어는 사시사철 잡을 수 있으나, 봄 2-3월에 많이 잡히고 이 시기의 홍어가 제일 맛있다고 한다.
전라도 음식에서 홍어삼합이란 단순한 음식 궁합이 아니라, 전라도가 아니면 어디에서도 맛볼 수 없는 전라도 맛의 진수이다. 우리가 아직 진가를 모르고 있을 뿐, 전라도가 가진 자원은 무궁무진하다. 그것을 발전시키는 것이 앞으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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